◆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연고와 서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 어느 집안, 어느 학교, 그리고 요즘엔 어느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에 따라서 잘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렇게 공공연히 인정되는 줄을 잡는 것이 출세의 비결이라는 확신을 갖고 지금도 열심히 그런 사돈에 팔촌, 아니면 이웃사촌이라도 없는지 찾아보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좋은 학교의 기준은 어떤 교육을 시키느냐가 아니라 상급학교의 진학률과 취직이 전부인 사회. 그래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탄탄한 출세 가도를 만드는 것이 모든 학교의 졸업생들에게 주어지는 지상 과업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고향 마을인 나자렛에 가셨다가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한 사건을 보고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지혜와 기적의 원천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6)라고 물으면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비유 말씀과 그분께서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이 자기들이 알고 있던 ‘그 청년’의 배경으로 볼 때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것입니다.
성경은 예언자를 가리켜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예언자들 스스로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신탁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하신 말씀의 이유입니다. 비록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단순히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람의 말로 알아들을 때 예언자는 배척을 받게 됩니다. 오히려 자기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인 양 겉꾸민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합니다.
예언자는 자기의 말을 하는 사람도, 청중의 호응을 받으려고 진실을 외면하고 야합하는 사람도 아닌 하느님의 말만을 전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어느 예언자가 옳고 그르냐는 청중의 마음에 흡족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그 말씀이 제대로 효력을 발생하느냐에 따라서 판단됩니다(신명 18,22; 이사 55,8 이하 참조).
현대사회의 보이지 않는 정보의 바다에는 수많은 말이 떠다닙니다. 국민들은 더 이상 단순한 정보의 소비자가 아니라 주체적인 생산자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말 가운데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는 예언인지는 그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위정자들과 ‘잘나가는 사람들’은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늘의 마음이라는 민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정석 신부(전주교구 가톨릭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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