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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월 17일 야곱의 우물- 마태 15, 21-28/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8-17 조회수502 추천수5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 무렵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마태 15,21-­28)
 
 
 
 
예수님께서는 종교의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정결법 문제로 격렬하게 토론을 벌이셨습니다(15,1-­20). 예수님은 자연 그대로 부정한 것은 없고 아무것도 하느님의 계획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흥분했겠지만, 예수님은 한 발 더 나아가 몸소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십니다. 부정한 이방인 땅에 발을 들여놓으셨고, 여인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예수님은 인종차별·성차별이라는 벽을 허물고 계십니다. 논쟁 이야기에서 기적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는 듯하나 그 초점은 치유에 있지 않고 이방인 여인의 믿음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 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물러가십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21절) 티로와 시돈은 카르멜 산에서 북쪽으로 55킬로미터 떨어진 지중해변의 항구도시로 지금은 레바논에 속하는 곳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시리아페니카아 여인이었는데, 마태오복음에 와서는 좀 더 종교적인 거리를 둔 가나안 여인이 등장합니다. 가나안 사람들과는 조상 대대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는 통합이 불가능하여 영원히 맞아들일 수 없는 민족입니다(신명 7,1-­6; 20,16-­18 참조). 그런 곳을 향해 예수님은 떠나십니다. 복음이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합니다.
 
어떤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22절)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분의 명성은 이미 국경을 넘어섰습니다. 이방인 여인이 도움을 청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한낱 동네 개 짖는 소리쯤으로 듣고 흘려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23ㄱ절) 제자들은 여인의 간청하는 외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입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23ㄷ절)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끼니 때울 게 마땅치 않을 때도 제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시라고(14,15). 이러한 제안을 한 뒤로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가나안 여인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제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절) 부당한 차별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것이 그들의 현실입니다. 그 여인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믿게 한다는 것은 유다 민족에게 복종하는 것뿐 아니라 그 관습과 역사에 동화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가나안 사람에겐 과감한 결단과 귀화를 요구하는 셈입니다. 사실 초대교회는 많은 갈등 끝에 이방인들을 받아들였습니다(사도 10장 참조). 그러나 이 여인은 그 무엇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25절) 얼마나 절박했으면 염치나 체면도 차리지 않고 주변의 무관심과 박대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26절) 이스라엘 사람은 자녀이고 이방인은 집에서 기르는 개로 묘사하십니다. 누가 들어도 경멸조입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때 이방인들의 선교를 반대하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표현으로 보입니다. 여인과 그 지역 사람들이 들으면 발끈할 정도로 수치스러운 발언이건만 아무도 토를 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방인 여인의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하고 계십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가나안 여인은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자신을 강아지에 빗대었는데도 전혀 동요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사실로 인정하고 순종적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특권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처지를 수긍합니다. ‘부스러기’만이라도 간절히 요청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고 자신의 바람을 거리낌 없이 간구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신앙을 마음껏 훌륭히 입증해 보인 것입니다. 그 신념이 예수님을 설득시켰습니다. ‘자녀들의 빵’이 모든 이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ㄴ절) 예수님은 진정한 개종자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의 신앙에 중심임을 인정하십니다. 정결법 운운하며 옛 사람의 전통에 매여 있는 하느님의 백성보다 훨씬 더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이 일은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28ㄷ절) 예수님이 감탄하시던 바로 그 시간에, 여인의 확고한 신앙이 딸의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이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도 이런 여인들 덕분입니다. 그들이 복음과 선교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과 갈등을 겪으셨지만 이방인의 땅에서는 뜻밖에도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만나십니다. 이방인 여인은 멀리서 들은 풍문만으로도 그분을 알아보고 확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는 선입견과 편견을 극복합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소중합니다. 유다인인가 이방인인가가 아니라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설령 예수님께 외면당하는 것 같아도 참다운 믿음이라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무엇이 걸림돌이고 무엇이 지름길인지, 이 여인의 믿음은 나에게 복음인지 도전인지 자신에게 물음을 던집니다. 여인한테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는 인내와 지혜, 믿음과 의지의 사람입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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