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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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8-08-17 조회수964 추천수15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8년 8월 17일 연중 제20주일 가해
 
 
 
 “O woman, great is your faith!
Let it be done for you as you wish.”
(Mt.15.28)
 
 
제1독서 이사야 56,1.6-7
제2독서 로마서 11,13-15. 29-32
복음 마태오 15,21-28
 
 
담배를 무척 좋아하는 두 분의 수사님이 있었습니다. 한시라도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골초였지요. 그런데 기도하는 시간도 많은데 기도 중에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래서 교황님께 청을 드려 보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한 분이 교황님을 만나러 가서 “교황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겠습니까?”라고 청을 드렸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아니,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기도 중에 담배를 피우다니요. 안 됩니다.”라면서 깜짝 놀라시며 반대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하겠지요? 아무튼 낙담을 하고 시무룩하게 돌아온 수도자는 다른 수도자를 보고 말했지요.

“기도 중에는 담배를 피울 수 없다고 하네.”

“그럼 이번에는 내가 다녀오지.”

이번에는 다른 수도자가 교황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수도자는 교황님을 만나고 온 뒤에는 기도 중에도 담배를 피우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먼저 다녀온 수도자가 “아니, 자네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이 수도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이렇게 교황님께 말씀드렸다네. 교황님, 담배 피는 중에 기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랬더니 교황님께서 ‘아주 훌륭한 생각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늘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라고 말씀해 주셨네. 지금 나는 담배를 피우는 중에 기도하는 것이라네.”

말이란 참으로 신기하죠? 똑같이 담배를 피게 해달라는 말인데, 어떤 말은 되고 어떤 말은 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허락을 받는 말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허락받지 못하는 말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는 이방인이었지요. 그런데 그녀의 사랑하는 딸이 마귀가 들린 것입니다. 그 누구도 마귀를 쫓지 못하자, 가나안 여인은 오로지 예수님만이 딸을 고쳐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합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면서 아예 무시하십니다. 제자들도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에게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큰 상처가 되시는 말씀을 하시지요. 즉, 너의 딸을 절대로 고쳐주지 않겠다는 표현인 것이지요.

어떻게 사랑을 늘 강조하시던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또한 어떻게 사람을 강아지로 표현하면서 무시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무시당하고 있는 여인의 입장에서 화를 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멱살을 잡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하면서 “너 죽고 나 죽자.”라고 난리치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이 말씀에 당황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우선 인정하면서 자신을 하찮은 강아지로 표현하는 말까지 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렇게 더욱 더 낮은 자세를 유지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의 말을 하는 것이지요. 결국 이 말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이 가나안 여인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혹시 내 감정대로만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주님께 원망의 말을 끊임없이 하지요.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이냐 면서, 왜 당신께서는 차별을 하시냐면서……. 즉, 주님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나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말을 할 때는 또 얼마나 많았을까요?

주님을 향한 나의 말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항상 나만 일방적으로 말을 했지, 주님의 말씀은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겸손하게 다가서지 못하고, 내가 주님보다도 윗자리에 있는 듯이 끊임없이 요구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말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어떤 말에도 화내지 않기.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좋은 글’ 중에서)

1983년 겨울, 아버지와 스키여행을 떠난 한 소년이 산 정상에서 케이블카를 놓쳐 혼자 남게 되었다. 아버지는 케이블카에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당연히 아들이 탄 줄 알고 찾아보지 않았다. 마을에 도착해서야 아버지는 아들이 없어진 것을 알고 부랴부랴 산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아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해는 이미 저물어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마을에 무전을 보내 구조대를 요청했다. 90명 이상의 사람들이 소년을 찾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구조대원의 손과 발이 꽁꽁 얼어붙었다. 이 잡듯이 산 구석구석을 전등으로 비춰가며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시간이 점점 흐르는데 소년을 찾지 못하자 소년의 가족들과 구조대원들은 더욱 초조해졌다.

뿌옇게 동쪽하늘이 밝아왔다. 소년이 얼어 죽었을 거라는 불길한 생각이 구조대원의 머리를 스쳤다. 날이 완전히 밝아서야 헬기 두 대가 수색을 지원했다. 헬기는 15분 만에 눈 위에 난 스키자국을 발견했고 그 자국을 따라가 보니 나무 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소년이 발견되었다. 무전으로 소년을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그 즉시 응급차와 의사들을 대기시켰다.

헬기가 산등성이에서 소년을 태우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소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똑바로 걸어 내리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모든 것이 얼어붙는 영하의 날씨 속에서 어린 소년이 어떻게 하루 밤을 무사하게 지낼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아버지의 품에 뛰어간 소년이 그간의 일을 똑똑하게 얘기했다.

"저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아버지는 그전에 제게 말씀하셨어요. 산에서 길을 잃으면 나무에 바싹 붙어 나무 가지들로 자기 몸을 덮으라고요. 그러면 한층 덜 추우니까 견디기 쉽다고 하셨어요. 저는 아버지를 믿었을 뿐이에요."

위험 속에서 살아난 소년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의 가슴에 묘한 감격이 밀려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는 아버지란 존재가 하느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기에…….
 
 
“Please, Lord, for even the dogs eat the scraps
that fall from the table of their masters.”
(Mt.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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