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삼송리에 내려와 시골 생활에 적응하며 사람들도 사귀고 농사일도 배우며 지낼 때입니다. 마침 오랜 지기가 넷째 아이 출산을 앞둔 때인데다가 곧 가을걷이를 해야 할 때여서 그 집 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일을 해도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농사일이 때를 놓치면 안 되는 일인데 다른 사람이 하루에 끝낼 일을 3일 동안 잡고 있으니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습니다.
더 부지런히 해보지만 워낙 손이 느리고 꼼꼼하게 일을 하다 보니 시원스레 속도가 나지 않아 미안한 마음이 점점 커졌습니다. 한 열흘 일을 했을 때 주인은 그동안의 품삯을 셈해 주셨습니다. 하루 일당 삼만 원을 고스란히 셈해 주셨는데 전 양심상 도저히 그 돈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농사일을 배운 수업료는 못 낼망정 제 노동의 합당한 품삯을 받고 싶어 하루 만오천 원이면 충분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한사코 일당을 삼만 원씩 셈해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딴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돕고자 한 제 마음까지 셈하셨나 봅니다. 그때 전 오늘 복음 속 포도원 주인의 그 마음과 함께 하늘나라는 이런 곳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일하러 온 일꾼이나 다 늦은 시간에 일하러 온 일꾼에게 같은 품삯을 셈해 줍니다. 그러니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일이 거의 끝날 즈음에야 일자리를 얻은 일꾼도 같은 삯을 받았으니 세상 이치로는 불합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하느님의 잣대와 세상 잣대의 차이입니다.
하느님은 일한 양이나 노동 시간만이 아니라 일자리를 찾아 애를 태워가며 길거리에 서 있었을 그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려 품삯을 셈해 주십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하루 종일 마음 졸이며 서 있었을 일꾼의 그 마음까지 헤아리는 계산법은 분명 우리의 계산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렇듯 모든 처지, 모든 입장의 사람들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잣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남궁영미 수녀(성심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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