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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람이 희망이다" - 8.24,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8-24 조회수580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님 강론 말씀)
 
 
 
 
2008.8.24 연중 제21주일                                          
이사22,19-23 로마11,33-36 마태16,13-20
 

                                                            
 
 
"사람이 희망이다"
 
 

사람이 희망입니다.
사람이 보물입니다.
 
물론 궁극의 영원한 희망이자 보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시지만,
눈에 보이는 최고의 희망이자 보물은 사람입니다.
 
보이는 사람 희망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 희망에 연결되기에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수도원의 예를 봐도 분명한 진리입니다.

아무리 경치 좋고 건물 좋아도 수도자가 없으면 수도원은 망합니다.
수도자가 있고 경치요 건물이지,
결코 경치와 건물 있고 수도자가 아닙니다.
 
별수 없는 경치에 건물이라 해도
거룩한 수도자들 있으면 수도원은 곧 일어납니다.

결국 사람이, 수도자가 희망이요 보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 돈 주고 살 수 있어도 수도자는 돈 주고 살 수 없기에
더욱 아끼고 보살펴야할 수도원의 희망이자 보물인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서강대학교의 모토가 참 마음에 듭니다.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Be as proud of Sogang, as Sogang is proud of you!).”
다음처럼 바꿔 써도 아주 고무적입니다.

“그대 하느님의 자랑이듯 하느님 그대의 자랑이어라!
  (Be as proud of God, as God is proud of you!).”

이런 자부심을 가져야 비로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하나 이런 자부심을 지니고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이요,
이런 자부심을 지니고 살아야 비로소 세상의 희망이자 보물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희망이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런 희망의 보물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첫째, 때를 알고 떠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변합니다.
만날 때가 있으면 떠날 때가 있고,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젊음의 때가 있으면 늙음의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 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걸 아는 게 유비무환의 지혜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
늘 죽음을 준비하며 깨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유한한 인생인데 영원한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때를 안다면 집착에서 자유롭습니다.
 
무지와 탐욕에서 벗어나 무욕의 맑은 눈으로 실재를 직시합니다.

일 잘하는 것도 아름답지만 자리에서 잘 떠날 때는 더 아름답습니다.
잘 사는 것도 아름답지만 잘 죽는 것은 더 아름답습니다.
앞모습보다 뒷모습의 아름다움이 오래 남습니다.
 
떠날 때를, 죽을 때를 염두에 둔 삶이라면
그렇게 막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1독서에서 궁궐의 시종장 세브나, 함부로 막 살다가
하느님께 강제 퇴장당합니다.

“나는 너를 네 자리에서 내 쫓고, 너를 네 관직에서 끌어내리리라.”
오늘 독서에는 안 나오지만
하느님의 기대 속에 그 뒤를 이른 힐키야의 아들 엘야킴도
결국 자기가족만의 부귀영화만을 돌보다가
하느님께 퇴장 당하고 맙니다(이사22,24-25).
 
새삼 한결같은 초지일관의 삶이,
잘 떠나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습니다.
 
올라가기도 힘들지만 내려오기는 더욱 힘듭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 중
아름답게 그 자리에서 떠난 이들 몇이나 됩니까?
 
진정 때를 아는 이가. 떠날 때를 알아 잘 떠나는 이가
아름다운 희망의 사람입니다.


둘째, 깊이를 알고 그 신비에 놀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깊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늘의 깊이,
생명의 깊이,
사람의 깊이,
삶의 깊이,
하느님의 깊이,
은총의 깊이,
성사의 깊이,
죄의 깊이 등
우리 지성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들로 가득 한 세상입니다.
 
이래서 깊이는 곧장 신비에 직결됩니다.
 
깊이의 신비들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신비가의 소명을 지닌 우리들입니다.

이 깊이의 신비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놀라움입니다.
놀라움에서 시작되는 신앙입니다.
 
깊이와 신비 감각의 상실에서
날로 메말라가는 내면들이요 얕고 가벼워지는 삶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얼마나 고무적입니까?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이방인들이 구원되고
이방인들의 구원에 이어 언젠가 이스라엘인들이 구원되리라는
하느님의 구원 신비에 압도당한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마침내 그 깊이와 신비의 핵심을 간명히 집어내는 바오로입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무의미한 우연의 삶이 아니라
신비의 원천인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으로 끝나는
의미 충만한 하느님 안에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진정 깊이의 신비를 깨달아 세상을 놀라움으로 보는 이들,
겸손하고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모두에게 보이는 희망의 사람입니다.
 


셋째, 고백할 줄 알고 그 축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것이 인생 유일한 목표입니다.
진정 주님을 알고 나를 알아야 행복이요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이를 일컬어 구원이라 합니다.
 
새삼 주님의 탐구와 함께 가는 나의 탐구임을 깨닫습니다.
내 정체성의 열쇠는 주님께 달려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역시 혼란의 와중에 있다 보면 정체성의 위기를 겪기 마련입니다.
 
제자들을 통해 참 자기를 확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단도직입적 질문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실존적 물음입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주님은 누구입니까?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이어 시몬 베드로의 통쾌한 답변입니다.
주님의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베드로입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는 물론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고백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려주셔야 가능한 고백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신 주님은 감격에 벅차
베드로의 신원을 밝혀 주시며 무한한 축복을 주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 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주님을 고백하는 우리 또한 베드로입니다.
우리의 인격위에 세워지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하여 주님은 우리의 자랑이듯
우리는 주님의 자랑이 그대로 실현됨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고백할수록 주님을 알게 되고
참 나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이 진정 축복의 구원입니다.
 
주님을 고백할 줄 알고
그 축복을 아는 이들이 행복한 사람들이자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희망입니다.

사람 희망은 자연스럽게 하느님 희망으로 연결됩니다.

때를 알고 떠날 줄을 아는 사람,
깊이를 알고 그 깊이의 신비에 놀랄 줄 아는 사람,
주님을 고백할 줄 알고 그 축복을 아는 사람,
진정 우리의 희망이 되는 사람입니다.
 
감히 ‘사람이 희망이다.’ 라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당신을 고백하는 우리들을
모두 희망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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