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주로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늘 이런저런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된다. 위대한 성현들의 지혜나 통찰을 배울 때마다 신선한 기쁨을 체험하는 것은 연구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갖는 특권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대가도 있다. 지식이 쌓일수록 마음 한구석에서 어떤 부담감과 괴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은 곧 ‘아는 것’과 ‘실천적 삶’ 사이의 간극을 의식할 때 일어난다.
특히 신앙에 관한 지식을 접할 때는 더욱 그렇다. 아무리 하느님의 신비를 벗겨내는 심오한 지식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마음과 의지’로 그것이 가르치는 바를 ‘원하고 행하는’ 단계까지 나가지 못한다면 그 거룩한 지식은 결국 공허한 느낌으로 귀결될 뿐이다. 누구보다도 이 점을 깊이 통감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몸을 일으켜서 천국을 잡아채는데 우리는 마음이 없는 학문으로 살과 피의 진흙탕 안에서 뒹굴고 있구나.” 하고 말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앎은 가장 거룩한 지식에 속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귀들도 이런 지식을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한테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원하는 것을 함께 ‘원할’ 의사가 없다. 아니 그런 일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마치 어둠과 빛이 함께 섞일 수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마귀들의 고백은 ‘신앙고백’이 아니다. 신앙은 그 진리를 ‘아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원하고 행하겠다는 ‘결단’까지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의 신앙이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신앙이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결단을 유보하고 그저 아는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리고 어둠의 세력 역시 빛과 자신을 구분할 줄 아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면, 양자 사이의 거리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매우 위태로운 상태가 아닌가!
이종진 신부(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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