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과부와 고아는 언제나 자비하신 하느님께 특별한 편애를 받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들의 가난이나 아픈 설움이 어떤 것인지를 아시는 분이기에, 마치 어미가 끼고 들어온 자식처럼 하느님은 그들을 남달리 챙기신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마음은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대로 지나치지를 못하신다. 남편이 죽은 이 과부에게 외아들은 기쁨이요 희망, 자신의 존재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은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숨은 쉬고 있어도 내면의 빛이 꺼져버린,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런데 절망 속에 울고 있는 가련한 어머니에게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시어 죽음을 생명으로 되돌려 주신다.
하느님은 지금 내가 경험하는 현재 상황에서, 바로 지금 내게 다가오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내 삶의 어떤 정황도 얼마든지 뒤집어 놓으실 수 있다. 지금으로는 도무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상황에도 하느님이 개입하시면 예수님의 부활이, 외아들의 부활이 바로 지금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내게 다가오시어 나의 삶을 바꾸어 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나와 가까이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얼마나 믿는가? 지금 내 안에 살아 계신 성령으로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동정녀로 하여금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케 하신 그 권능,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느님의 권능이 바로 성령이시다.
우리 내면에도 ‘젊은이’가 있다. 바로 하느님이 주신 ‘생명의 역동성’이다. 나는 지금 하느님이 주신 내 안의 젊은이를 죽인 채, 그가 죽었다고 떠매고 가는 죽음의 행진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 하나가 내면의 빛을 잃게 되면 주변 사람들까지 함께 어둠 속을 걷게 만든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복음은 바로 지금 나에게 선포되는 하느님의 살아 계신 능력의 말씀이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내 안에 죽어 있는 젊은이를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키신다. 성령의 능력이란 삶을 바꾸어 놓는 새로운 생명이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방순자 수녀(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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