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희생하는 것이 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16 조회수708 추천수5 반대(0) 신고
한 잡지에 산타 클라라 수영클럽 소속의 10대 소년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그들은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서 찬 공기를 마시며 서둘러 야외 수영장으로 간다. 거기서 두 시간 동안 수영을 하고 샤워를 한 후 간단히 요기를 하고 학교로 달려 간다. 학교가 파하면 다시 수영장으로 돌아가서 두 시간 이상 수영을 한 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 저녁을 먹은 후 잠깐 책을 보고 파김치가 되어 쓰러져 잔다.
 
 다음 날 아침 자명종이 5시 30 알리면 다시 어제와 같은 일과를 거듭한다. 한 소녀에게 왜 그렇게 수영을 하면서 희생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한 소녀가 답했다.
 
“저의 목표는 올림픽 팀에 선발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파티에 가면 속상하여 돌아 올 때가 많은데 왜 가죠? 더 많이 연습하면 더 나아져요. 희생하는 것이 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친구들과 지인들과 회식을 많이 한다. 회식이 일종의 파티인 셈이다. 그러나 이 소녀가 말했듯이 기분이 상하여 회식을 끝낼 때가 많다. 마치 가면 무도회를 하듯 자신을 숨기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큰 소리가 나오고 싸움판이 벌어지고 아수라장이 되어야 회식이 끝나는 수가 많다. 이른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많아서 속이 상하게 되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고 헤어지기 십상이다.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자기 변명이 아닐까?
 
 나 자신도 예민한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모임에 나가면 거의 어김없이 속을 상해서 귀가하게 된다. 또는 기분이 나빠서 2차를 가기도 한다. 아내는 그래도 모임에는 빠지지 말라고 한다. 소녀가 말했듯이 수영을 열심히 하면 더 나아지게 되는 것은 자기 희생 덕분이다. 희생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하여 자신을 죽이는 일이다. 그런데 이기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어떻게 남을 위하여 희생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사랑에는 희생이 따르게 마련이다. 또 존경심은 사랑의 첫 걸음이다. 존경심은 남을 떠바치는 것이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사랑에 익숙하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비겁하게 사는 모습을 회식자리에서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 왜 이 말이 잊혀지지 않을까? 왜 이 말이 연도(連禱)의 후렴처럼 되어 버렸을까? 어떤 시적(詩的)인 장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잘못된 진리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정당화하고 합리화시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대사제 카야파(Caiphas)가 처음으로 한 말이다. 그리스도의 위격(位格)과 이미지를 전도(顚倒)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잘못 오도하고 있고, 복잡한 사회생태를 말해 주는 오래 동안 맺어 온 인간과의 관계를 오해하도록 만들고 있다. 사실 그 당시에 카야파와 다른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겁만 주고 있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비난할 때에는 악의보다는 두려움이 더 많았다. 카야파가 이 말을 한 것은 두려움에서였으며 죄 없는 죽음을 묵인한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두려움과 그 말이 항상 죽음을 정당화시켰고 무수한 죽음을 묵인한 우리들의 잘못을 합리화시키고 있다. 너무나 많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연도(連禱)의 후렴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 우리들이 사형을 찬성하고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 왔는가와는 상관하지 않고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을 지지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할 때가 많다.
• 낙태를 할 때, 태어나지 않은 한 생명을 뺏을 때,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을 때나, 복지 노인의료보험과 탁아소 설치와 의무교육을 시킬 여유가 없다고 말할 때나, 어린애들과 함께 집에 있는 어머니들을 돌볼 여유가 없다고 말할 때나, 우리들의 생활기준을 바꾸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지나쳐버리려고 할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 대화 중에 어떤 사람이 모욕을 당하고 있는 데도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할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 우리 나라가 이웃 나라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면서도 폭격을 하려 하거나, 우리 나라가 방어용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당치도 않은 많은 돈과 재능과 자원을 사용할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 우리 나라가 난민을 받아 들이면 일자리를 잃게 되고 우리들의 생활수준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두려움을 핑계로 하여 피난처를 마련하지 않으려고 할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
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 우리 나라가 우리 시대의 불만족과 테러주의가 생활관습, 시스템의 부산물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고는 변화가 두려워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 우리들의 생활습관 때문에 세계의 자원을 너무 많이 소비하거나 같은 이유로 자연을 존경하지 못하고 과도한 소비를 하고 동시에 공해를 만들어 다음 세대를 위한 환경을 파괴할 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 몬트리얼(Montreal)의 한 젊은 갱이 지하철에서 에이즈에 걸려 있는 동성애 남자를 짐승처럼 죽이고 공격자와 방관자(다른 이유로)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말콤 엑스(Malcolm X),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 제르찌 포피에루츠코(Jerzy Popieluszko), 스탄 라더(Stan Rather), 미카엘 로드리고(Michael Rodrigo)와 안네 프랭크(Anne Frank)가 피살되었을 때나, KKK단이 1960년대 초에 미시시피에서 세 민권운동자를 죽였을 때나, 독재정권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때,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카야파부터 우리들에 이르기까지 수 세기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또 우리들의 생활양식을 바꾸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우리들이 바꾸는 것보다 이것이 더 낫다는 식으로 우리들은 연도의 메아리를 울려 왔다.
 
 필립핀의 신(Jaime Sin) 추기경이 덕행을 하면서도 용기를 보여주어야 할 곳에 대하여 말하였다.
 
공감하지 않는 권력은 폭력이며
정의 없는 공감은 감상(感傷)이며
사랑 없는 정의는 막스주의이며
그리고… 정의 없는 사랑은 거짓말이다.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아무 반성도 없이 또 무의식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고, 약함이나 두려움 때문에 겁 먹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며, 부(富)와 특권과 명예를 초월하여 살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기도해야 하며, 죄 없는 사람의 죽음을 묵인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거나 기꺼이 죽을 수 있게 겁먹지 말고 작아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소녀는 올림픽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였다. 그런데 우리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자신을 희생하면서 수행하고 있는가? 
(롤하이저 신부님의 묵상글을 편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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