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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복음 맛 들이기 - 연중 제 25주일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20 조회수608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 25 주일 - 부러우면 지는 거다

 

                                                                                        < 마태오 20, 1-16 >

 

 

 군대에서 군번이 잘 풀리면 자기 위로 선임이 별로 없어서 왕고(참)를 오래 해 먹을 수 있습니다. 저는 군번이 꼬여서 제 위로 이주일 먼저 들어온 선임이 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대하는 며칠 전까지 그들을 선임병으로 모셔야 했습니다.

위계질서가 가장 강한 곳이라면 일반적으로 군대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 선임들이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나이를 많이 먹은 것도 아닙니다. 단지 며칠 먼저 들어왔다고 해서 군 생활하는 내내 졸병노릇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군대에선 왜 이렇게 짬밥이 중요한 걸까요? 며칠 더 산 것이 뭐가 중요하다고 그걸 무기로 복종해야하는 계급이 형성되는 것일까요? 이런 위계질서는 단체마다 다 차이가 있지만 사람이 함께 사는 곳이라면 다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더라도 더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곳에 위계질서도 더 강합니다. 서열이 강조되는 것은 그만큼 더 살기 힘든 곳입니다. 군대에서 밥 한 끼 더 먹은 것으로 그렇게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더 고생한 세월이 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훈련소에서는 한 주일 선배들이 한 주일 후배들에게 지나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니들 같으면 자살한다.”

한 주일 고생 더 한 것이 그만한 우월감과 서열을 만드는 것인데 사실은 그만큼 더 고생했으니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군기가 센 곳에서 후임이 선임보다 더 윗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능력을 과시하게 되면 선임은 그것을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더 고생한 것은 자신인데 그래서 자신이 더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후임이 더 능력 있어서 자신보다 더 대접을 받는다면 서열의 혼돈이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단체에서든 후임이 선임을 앞지르면 선임은 스스로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되고 존재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그렇게 믿어왔던 서열의 혼돈이 오면 윗사람도 밑에 사람도 또 자신까지 미워지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아침부터 뙤약볕에서 고생 고생한 일꾼들이 있는데 단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에게 주인이 더 잘해주는 모습을 볼 때는 주인도 미워 보이고 그 사람들도 얌체처럼 보여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런데 주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렇게 일찍 고용되었던 사람들은 불평을 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주인에게 더 안 좋게 찍히고 맙니다.

그리고 주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포도밭은 바로 교회를 나타내고 주인은 하느님입니다. 먼저 일하러 온 사람들은 먼저 세례를 받아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고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은 지금 막 주님을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날 먼저 세례를 받고 교회를 위해 더 일을 많이 했지만 갓 세례를 받고 죽은 사람들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할 때 위의 경우처럼 ‘부러우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 정말 지는 것입니다. 정말 많은 시간 고생했으나 꼴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은 힘들게 오래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주일에 놀러 가지도 못하고 미사 참례했고 거짓말도 못하고 양심대로 살려고 노력하면서 많은 돈을 성당에 봉헌하며 힘들게 살아왔는데 놀 것 다 놀고 즐길 것 다 즐기다가 막판에 신자가 된 사람보다 더 나은 대접을 못 받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면 위의 경우처럼 하느님을 불공평하다고 여기기에 정말 꼴찌가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왜 늦게 들어온 사람들이 인정받고 좋게 평가받는데 그것이 싫어질까?’ 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생을 하였다고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힘들게 고생했는데 고생을 하나도 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취급당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무슨 군생활인 양 착각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날 신앙생활 오래하고도 꼴찌가 되는 일이 없기 위해서는 부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부러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행복해야 합니다. 내가 상대보다 무엇인가 부족했기 때문에 부러워하는 것이기에 내가 신앙생활에서 충분히 행복했다면 그것으로 보상은 이미 충분히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을 가짐으로써 더 행복했다면 그 동안 신앙을 갖지 못해 늦게야 하느님을 알게 된 이들을 불쌍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만약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이 자신들을 불러준 주인에 대한 고마움의 보답으로 생각하며 기꺼이 일을 하였다면 그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맘고생을 하다가 늦게 들어온 이들에게 시기가 아니라 안쓰러운 마음을 가졌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 하면서 점점 더 하느님을 알아가는 기쁨에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꼴찌가 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제서품을 마치면 주교님들이 새 사제 앞에서 강복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습니다. 주교님이라면 가장 높은 분이므로 대접을 받아야 하지만 새 사제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서 그들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라야 주교님은 참 주교님이 되고 새 사제는 사제로서 당당하게 첫 발을 내 딛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듯 처음 들어오면 군기를 잡기 위해 선임을 존경하는 것부터 가르치는 그런 집단이 아닙니다. 믿는 것 자체가 행복했기 때문에 늦게 온 이들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고 자신보다 더 나을 수 있도록 존중해주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권위를 강조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삶이 힘들다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무신론자가 봉쇄수도원에 가서 수도원 원장신부님께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습니다.

“정말 이렇게 봉쇄수도원에서 살아가시는 분들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도 나오지 못하고 고생고생 하는데 만약 죽어서 하느님이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때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한 번 수사님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여기는 가두어 두는 곳이 아닙니다. 모두가 스스로 원해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가운데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고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죽어서 하느님이 안 계셔도 이 분들은 이렇게 주님 안에서 행복하게 산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느님이 계시다면 정작 놀래야 할 분은 당신일 것입니다.”

  우리도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봅시다.

우리가 구원을 얻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믿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되고 점점 커가지 않으면 그 신앙은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위의 수사님들처럼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에 더 힘들어진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았기에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부터 누가 부럽다고 느껴진다면 그는 이미 진 것입니다.

 

 

 

               ☆ 로마에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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