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If God is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Rom.8.31)
제1독서 지혜서 3,1-9
제2독서 로마서 8,31ㄴ-39
복음 루카 9,23-26
아주 가난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영세를 받아 열심히 성당을 다니게 되었지요. 그리고 다짐을 했습니다. 자기 수입의 십분의 일은 꼭 주님께 봉헌을 하겠다고요.
그는 당시의 수입이 겨우 십만 원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만원을 십일조로 봉헌하면서 자신이 큰 부자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더 벌어야 주님께 더 많이 봉헌할 수 있지 않겠냐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청년의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월 소득이 백만 원이 되었습니다. 이제 십만 원을 십일조로 드려야 하는데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도 한번 작정한 약속이니 계속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월 소득이 천만 원이 되는 사업가가 된 것입니다. 이제 백만 원을 십일조로 봉헌해야 하는데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저히 십일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나처럼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다른 이처럼 약간의 성의만 표시해야지.’
바로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이 청년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많은 액수의 십일조에 부담을 느낀다니 어쩔 수 없지 뭐. 그렇다면 이제 부담 없이 십일조를 봉헌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게. 한 달에 예전처럼 십만 원만 벌도록 해주마.”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기 보다는 늘 자신이 손해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받는 것에 익숙해있지, 주는 것에는 너무나도 낯선 우리들이 아닐까 싶어요. 하긴 묵상을 하다 보니 저 역시도 여기에 예외가 아니더군요.
저는 간석 4동 성당으로 재작년 12월 부임한 이후 참으로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좋은 신자들과 함께 살고 있고, 좋은 환경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종교미술학부를 인수해서 이제 넓은 공간까지도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왜 나한테는 이렇게 많은 일거리만 주워질까를 생각했지요. 또한 지금 공사를 하는데 있어서도 ‘어떻게 하면 싸게 할까?’만을 생각했습니다. 물론 부지구입비 마련에 어려움이 있기에 공사를 최대한 싸게 해야 한다는 핑계만을 대고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보다도 훨씬 어렵게 살았던 중세 시대의 화려한 성당과 멋진 성물들을 보면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님께 가장 좋은 것을 봉헌한 선조들의 마음을 볼 수 있지요. 또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통해서도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가장 귀하다는 생명을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순교했지요. 그런데 지금 나는 과연 주님께 최고의 것을 봉헌하고 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편함만을 생각하면서, 주님께 나의 소중한 것들을 봉헌하겠다는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순교자의 마음이었고, 이 현재를 순교자의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때 순교 성인들에게 열린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도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순교자의 마음으로 최고의 것을 주님께 봉헌합시다.
성장을 가로막는 것(‘행복한 동행’ 중에서)
한 청년이 풀 죽은 얼굴로 한참 동안 비단잉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수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죠?”
수족관 주인이 물었다.
“부러워서요. 저 비단잉어 좀 봐요. 저렇게 화려하니, 보나 마나 비싼 값에 팔려 호강하며 살겠지요.”
사연을 들으니 청년은 가난한 환경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 초라한 학벌 때문에 사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공장에 들어가야 했다며, 가난이 모든 걸 망쳤다고 푸념했다.
“저 비단잉어의 특징이 뭔지 알아요?”
수족관 주인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바로 환경에 따라 자기 성장을 맞춘다는 점이에요. 강물에 방류하면 100Cm까지도 거뜬히 자라는 것이, 연못에 풀어놓으면 25Cm 이상 자라지 않는답니다. 작은 어항에 넣어 두면 어떻게 될까요? 기껏해야 10Cm 정도 자라다 멈추고 말죠.”
“환경에 따라 성장을 조절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뭔가 느껴지나요?”
청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 처지와 비슷하군요. 비좁은 공간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장을 멈춘 거잖아요. 물고기조차 환경에 따라 조무래기에 머물기도, 대어로 성장하기도 하는데 사람이야 오죽하겠어요.”
“그게 아니죠. 잉어에게는 본디 열 배, 스무 배로 자랄 여지가 충분히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 처지에 맞춰 여기 이 녀석들처럼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조무래기에 머물러 버리기도 하죠. 몸이 커지면 당연히 더 너른 공간으로 옮겨갈 텐데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비단잉어처럼 자신을 작은 세계에 끼워 맞추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꿈을 작은 어항에 가두지 마라. 우리의 태도에 따라 우리는 어항을 선택할 수도, 연못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드넓은 강을 선택할 수도 있다.
9월 21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이네요.
빠다킹 신부님! 마태오 영명 축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영육간에 늘 건강하시도록 기도드리며,
주님 사랑 앞으로도 넘치도록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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