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9.24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잠언30,5-9 루카9,1-6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삶이 어지럽고 혼란할 때,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구나 저절로 나오는 질문입니다.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출구 없는 이런저런 다양한 감옥에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나라도, 회사도, 학교도, 가정도
넉넉한 보금자리 품이 아닌
사랑 없는 치열한 경쟁사회의 감옥으로 변모하여 가는 추세가 아닙니까?
하여 자살하는 이들이 날로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꼭 눈에 보이는 감옥만 감옥이 아니라
힘들고 사방이 꽉 막힌 삶이라면 그 어디나 감옥입니다.
그래서 훌훌 자유로운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는 가 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자유와 행복입니다.
이런저런 감옥에서 벗어나야 자유와 행복인데
과연 이런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 몇이나 될까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물음에 대한 답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지,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삶은 하느님의 선물이요 과제라는 자각입니다.
그저 오래, 건강하게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삶 자체가 목적인양,
살기위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운동하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육신의 건강에 힘쓰지만,
이렇게 삶 자체가,
건강과 장수 자체가 우상이 되어 집착할 때
결코 자유롭지도 행복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감옥의 유일한 출구인,
궁극의 자유와 행복의 열쇄를 지니신 하느님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진정 잘 살기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찾는 길이 우선입니다.
살기위해서 끊임없이 밥을 먹고, 일하듯,
살기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미사하고, 성경공부입니다.
이래야 삶의 중심과 의미이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비로소 삶이 하느님 주신 귀한 선물이자,
하느님을 향해 완성해가야 할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막연한 목표 없는, 허무하고 무의미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구원의 출구를 잊어버리면
결코 유형무형의 어두운 감옥에서
점점 무거워지는 삶의 무게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둘째, 소유의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유는 행복은, 소유로부터가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시편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시편16.2).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이 소유의 환상 속에, 소유의 노예 되어 삽니다.
최소한도의 의식주 생활을 위해
이렇게 꼭 혹사당하면서 일해야 하는지 참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옷 몇 벌에, 하루 세끼 식사,
잠잘 적당한 공간, 적당히 일할 터전만 마련되면 되는 것 아닙니까?
평생 써도 다 못 쓸 재물을 지니고,
본인이 사용하지도 않는 넓은 땅,
여러 채의 건물을 지니고 끝없는 소유욕에 휘둘리며 사는
어리석은 부자들 적지 않을 것입니다.
죽으면 다 놓고 갈 것들에,
한 몸뚱어리 묻힐 땅은 몇 평만 있으면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래서 소유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소유가 아닌
하느님께 의지하게 하고자
제자들에게 무소유의 삶을 명령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소유의 환상 속에 빠져
하느님을 잊을 위험을 직감한
잠언 저자의 간절한 기도가 공감이 갑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 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도 닦기 힘들다는 말도 있듯이
소유욕에 중독, 노예 되면 하느님을 잊기가 십중팔구입니다.
결국 소유도 우리에게 궁극의 자유와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유욕의 무지의 미몽에서 깨어나 하느님을 만나는 게 급선무입니다.
셋째, 훈련(수련) 없이는 자유도 행복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유와 행복을 위한 구체적 처방이 영적훈련입니다.
인간의 자발성에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입니다.
탐욕의 노예 되기 십중팔구요,
이성의 간교한 합리화에 남아나지 않습니다.
욕망에 굴레를 씌워야,
욕망을 길들여야, 욕망의 주인이 되어야 비로소 자유와 행복입니다.
이래서 영성생활에 자기와의 싸움을 영적전투라 하여 중요성을 둡니다.
하여 수덕생활 다음에 관상생활, 이게 순서입니다.
욕망 절제의 수덕생활에 이어
비로소 자유와 사랑의 관상생활이 가능합니다.
이래서 계명과 법이 있고, 규칙이 있고, 관례가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당신 말씀을 철저히 지킬 것을 못 박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라.
병자들을 고쳐주라.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 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등 꼭 지켜야 할 규칙을 제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잠언 저자 역시 하느님의 말씀 수행에 전념할 것을 당부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신다.
그분의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말라.”
가능한 한 합리화로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말고
말씀 그대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결론하여, 본질에 충실 하자는 것입니다.
사실 위의 수행들, 본질을 살기위한 것입니다.
삶이 선물이요 자각임을,
소유가 환상임을,
훈련 없이는 자유도 없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본질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이자 영원이요
나머지는 모두 환상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언젠가는 모두 사라질 것들입니다.
이렇게 본질 자체이신 하느님이 우리의 모두임을 알 때
부수적인 것들은, 환상은 저절로 떨어져 나가 이탈과 초연의 삶입니다.
허위와 거짓말도 멀리하게 됩니다.
최소한도의 의식주에도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뿌리를 잡으면 가지들은 저절로 잡히듯
하느님을 꼭 잡고 있으면 필요한 부수적인 것들 역시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이나 제자들,
본질 자체이신 하느님의 나라를 붙잡았기에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했으며,
잠언의 저자 역시
하느님을 중심에 모심으로 소유욕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본질에 충실하여 항구히 하느님만을 찾을 때
참 자유에 행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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