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신 후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시고(9,22), 영광스러운 변모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신 후에는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신다(9,44). 예수님은 당신의 놀라운 모습과 능력을 본 제자들이 군중의 감탄에만 현혹되어 당신의 사명을 오해할까 염려스러우셨던 듯하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점에 대해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다(9,45).
제자들이 ‘두려워했다’는 말에서 나는 비슷한 체험을 했던 어느 피정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날 수녀님께서 내주신 기도 주제는 바로 그 유명한 ‘성 이냐시오의 기도’였다.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력과 지력과 모든 의지와 내게 있는 것과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소서. 당신이 내게 이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그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 의향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내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이것이 내게 족하나이다.”(영신수련 234)
나는 이 기도를 제대로 바칠 수가 없었다. 내가 넘어가지 못하고 걸리는 곳은 바로 ‘나의 기억력과 지력을 받아들이소서. 이것을 당신께 도로 드리나이다. 그것들을 당신 의향대로 처리하소서.’ 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기억력과 지력을 온전히 하느님 손에 봉헌할 수가 없었다. 기억력과 지력을 상실해도 좋다고 하는 건 나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내 전 존재를 온전히 하느님 손에 맡기겠다는 무한한 신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기도를 한다고 당장 하느님이 내 지력을 빼앗아 가는 시험을 하실 리도 없건만, 나는 두려웠다. 하느님이 언제라도 내 기도를 들어 허락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자들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하지 않았던 건 그것을 거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알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고 차츰 그것을 받아들이는 고통스러운 과정도 겪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멀지 않은 미래에 닥쳐올 자신들의 수난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샤를 드 푸코의 ‘위탁의 기도’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것에 마음이 묶여 있는 나는 이 ‘위탁의 기도’ 역시 쉽게 바치지 못한다. 기도문이 매끄럽게 읽히지 않고 자꾸 내 안의 어떤 것과 마찰을 일으키며 꺼끌꺼끌하다. 그래도 매일 이 ‘위탁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 사랑에 나를 내맡기는 연습을 조금씩 해나가고 있다.
장수정(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