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예수님 시대에 세리와 창녀들은 공적으로 죄인인 사람들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공적인 죄인들은 많다.
비행 청소년들, 마약 본드 흡입자들, 에이즈 환자들,
그리고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
교도소에 방문한적 있으신지요?
신학생때 교도소 후원미사에 몇번 참석한 적 있는데
정문부터 싸늘한 분위기가 온 몸을 사리게 만든다.
신분증을 내놓고 들어가는데 담배, 칼, 기타 등등
모두 내 놓고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간 그곳에
무기징역수 사형수들이 예비자 교리를 받고 있고
세례를 받고 성체를 모시고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묘한 생각이 들었다.
도데체 정말 이들이 죄인인가?
어쨋든 사회적으로 공적 죄인인
이런 사람들은 공적으로 사회가 바라는 선한 삶을 거부한 사람들이다.
복음서 큰 아들처럼 "싫어요"하고 말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래서 더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갈 때까지 갔기 때문에 이제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사람들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의
의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간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음을 고쳐 먹고 다시 일어서기만 하면 되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바리사이와 수석사제들은
아직도 공중으로 높이 올라가고 있는 던져진 돌과 같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던져진 돌멩이가 가장 높이 올라간 순간부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하듯이,
이들은 자기가 가진 능력을 쓸만큼 다 쓰고, 부릴 수 있는 권세를 다 부리고 나면
결국 아래로 떨어지게 될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제 아래로 떨어지는 일만 남은 사람들이다.
아직도 하늘 높이 높이 올라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요한이 나타나서 아래로 내려가라,
회개하라고 요청했을 때 콧방귀만 뀌었던 사람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칠 수 있는 사실 하나,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것,
그래서 하느님께 믿음을 갖게 되는 것,
그래서 신앙을 갖게 되고,
그래서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은
죄가 없을 때가 아니라, 죄가 많을 때라는 사실이다.
내가 아주 아주 죄가 많다는 걸 깨달을 때
비로소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이 사랑인 것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회에서 지탄받는 문제아가 되거나
실패한 인생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한다면
더 많은 사람을 더 잘 이해하는 마음 넓은 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기 죄를 깨닫는 사람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비해,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요한이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이 가르친 것은 “회개”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뭘 회개하라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하고 회개를 거부하였다.
결국 같은 말이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아이러니 하게도 죄를 통해서다.
그것은 마치 손을 불에 데어 봐야 불이 몸을 태우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나에게 부족한 것이 있고,
그것을 안타까와 하고,
그래서 그것을 고치려고 없애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신데도
죄인처럼 십자가에 사형당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것은 아래로 아래로 자신을 낮추는 분의 모습이었다.
아래로만 내려가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물이다.
만일 물이 위로 흐른다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고맙게도 물은 아래로만 흐른다.
우리도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래야 그 맨 아래에 계신 예수님,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만나고 우리가 원하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자기를 아래로 낮추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아래로 아래로…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뉘우치고 고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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