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글줄깨나 쓰고 말발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싸움을 걸어옵니다. 만만치 않은 그분과 논쟁을 벌이며 자신들이 옳음을 관철시키려 하지만 그들의 약점과 허점만 드러날 뿐입니다. 그들의 지식과 권위와 명성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34절)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논쟁은 사실 터무니없었습니다(23-33절).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 몸 바친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이지만, 부활이 지상 생활의 복사판은 아니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치에 닿는 몇 마디 말씀에 사두가이들은 말문이 막혔고 군중들은 그 가르침에 다시 한 번 탄복했습니다(33절). 바리사이들은 부활 문제에서 사두가이들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데다 사이도 좋지 않았던 터라 이 소문을 듣고 내심 통쾌해했습니다. 모처럼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두가이들 코를 납작하게 만든 예수님을 만나러 우르르 몰려옵니다.
“그들 가운데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35절) 바리사이들은 종교 규정을 완벽하게 준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과연 예수님께서 얼마나 알고 계신지 떠보려고 합니다. 뭔가 속셈이 엿보입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아주 오래된 질문입니다. 힐렐 랍비는 모든 계명 가운데 황금률(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7,12 참조)을 최고 계명으로 쳤고, 샴마이 랍비는 모든 계명을 빠짐없이 철저히 준수하라고 가르쳤습니다. 613개나 되는 율법 규정 가운데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다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는 이들입니다. 백성들은 이 복잡하고 어려운 율법을 암기할 수도 지킬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적어도 어디까지는 꼭 준수해야 하는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의 요지는 어떤 계명이 율법 전체를 하나로 요약하고 한번에 지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고백문을 인용하여 하느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여기서 약간 수정하십니다. ‘힘을 다하여’를 ‘정신을 다하여’로. 마음과 목숨과 정신은 인간의 온전한 존재 전체를 가리킵니다. 곧 하느님께 생명과 인생 전체를 바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율법 전체를 ‘사랑’으로 요약하십니다. 사랑은 의무와는 다릅니다. 기꺼이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동이며 기쁨이며 충족입니다. 의무나 책임으로 똘똘 뭉친 율법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사랑은 율법의 해방입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38절) 첫째가는 계명이란 모든 종교적 삶을 결정짓는 주된 계명을 말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9절) 둘째 계명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알려진 레위기의 이웃 사랑을 꼽으십니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이스라엘 사람들한테는 동포만이 이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웃은 제한이 없습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따져가며 하는 사랑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도 같습니다. 모든 이가 내 이웃이고 나도 모든 이에게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기회가 똑같이 주어집니다. 나와 이웃은 모두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인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가는 계명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계명입니다. 마르코복음서에서는 조금 다르게 얘기합니다. 율법학자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 예수님은 그의 슬기로운 대답을 칭찬하시며, 하늘나라가 그에게서 멀지 않다고 하십니다(마르 12,34).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40절) 바리사이들은 율법에 관하여 물었으나 예수님은 사랑 타령이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충실성을 얘기하는데 하느님은 사랑의 충실성을 말씀하십니다. 사랑에 충실하다면 613개의 율법 규정을 준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계명이 성경 전체를 폐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예언서를 더 올바른 시각으로 보게 합니다. 성경 전체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
종교에 그토록 열정적이던 바리사이들은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들 스승들이 가르친 것과도 통할 것인데 묵묵부답입니다. 백번 옳은 말씀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속셈 따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은 진리만을 말씀하십니다. 입만 떼시면 한결같이 진리의 말씀이십니다. 사랑에 충실하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든 강제적인 법 없이도 응답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곧 예수님은 수난을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을 실현하실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원수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웃을 용서하시고 그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십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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