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 안에서의 죽음 ....... [김상조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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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광자 | 작성일2008-10-31 | 조회수790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을 때엔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죽으리란 말씀이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이 머무는 성전이다.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죽는다는 말이다. 하느님과 함께 죽는다는 말이다. 요나가 죽을 때 그는 그렇게 했다.
나를 바다에 던지시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내 탓이니. 그 때 요나가 경험했던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도망쳐도 찾아내는 하느님이었다. 죽음 직전에, 어찌 되었든 결국 죽어야 할 처지에 떨어졌을 때 요나는 하느님을 만났다. 어딜 가더라도 찾아내는 하느님을 만났다. 하지만 그렇게 만난 요나의 하느님은 어딜 가도 찾아내서 벌을 주는 무서운 하느님이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 죽음의 순간에 찾아와서 손을 내미는 하느님이었다. 그 손은 채찍을 든 손이 아니라
허약한 육신을 받쳐주고 공포에 뜨는 영혼을 감싸주는 손이었다. 요나는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께 자신을 던졌다. 그리고 사흘만에 새로운 삶으로 되돌아 왔다. 사흘째 되는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날이다.
그 날엔 당신 일을 마치신다고 하신다. 예수님의 일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그리고 덧붙여서 죽는 일까지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을 때엔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한다는 말씀이.
요나 처럼 하느님 앞에서, 아니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께 자신을 던지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새로운 삶을 얻게 될 것이다. 그 후의 삶은 다를 것이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던진 다음 맞이하는 삶은 다를다. 그것은 삶이라기 보다, 즉 내가 이러 저러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즉 “하느님께 모든 것을 던지면 사는 세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만들어주시는 세상에 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던진 후에 맞이하는 세상이다.
아주까리가 자라서 그늘을 만들어주고, 아주까리 보다 더 소중한 아이들만 해도 수십만이나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자상한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되는 세상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예수님은 당신 길을 가신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그분처럼, 우리의 인생도 결국엔 죽기 위한 삶이다.
오늘도 내일도 살 것이지만 결국엔 죽을 날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죽을 때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죽어야 한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죽을 때엔 모든 것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죽어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에 맡길 것인가? 자녀에게? 혹은 연인이나 친구에게 맡기고 죽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걸 위해서라면 이 인생 그렇게 열심하게 살 필요 없다. 다 남 주고 말 거라면, 그리 열심히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것,
죽으면서 자녀에게 주거나 사회에 환원한 것 까지도 결국엔 하느님께 다시 돌려드릴 “달란트”들이다. 우리 삶, 오늘도 내일도 계속되는 이 삶은
그저 숨이 붙어 있으니까 마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맡길 수 있는 그분을 만나기 위해 사는 삶이다. 그 분은 예루살렘, 다시 말해 성전에 사신다.
예수님은 그 성전, 곧 하느님 품에서 죽고 싶어하신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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