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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월 30일 야곱의 우물- 마르 13, 33-37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30 조회수1,064 추천수5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마르 13,33-­37)
 
 
 
 
13장은 수난 이야기 앞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죽음·부활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올리브 산에서 성전을 내려다보시며 종말에 관한 마지막 설교를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고하시면서(13,1-­2), 종말의 전조로 가짜 그리스도가 등장하고 전쟁과 기근, 지진과 교회 박해 등 작은 불행이(5­13절) 이어지다가 종말이 임박할수록 훨씬 더 큰 불행들이(14­-23절) 밀어닥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결국 종말에는 사람의 아들이 구름에 싸여 내려와 온 세상의 선민들을 소집할 것입니다(24­-27절).
예수님의 이 설교는 표현상 분명히 묵시문학적 색채를 띠고 있으나 내용은 묵시사상과 거리가 멉니다. 미래 사건을 들추어내기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경고와 위로 가운데 회개와 믿음의 결단을 강하게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은 언제 있을 것인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묵시문학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는 모습을 임금님의 행차처럼 묘사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묘사일 뿐 하느님 나라와 사람의 아들의 재림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루카도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장소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종말은 무화과나무의 새싹이 여름을 예고하듯이, 여러 가지 조짐 가운데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그러나 종말이 정확히 언제 도래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32절) 그때는 아들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때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생명과 영광까지도 아버지께 맡기고 순종하십니다. 스승도 모르는 것을 제자들 역시 알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무화과나무로부터 그때가 가까웠음을 배울 따름입니다.(28절)
 
당시 초기 공동체는 예수님의 두 번째 오심을 눈앞에 닥친 사실로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 시대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것이라는 예고가 세 번 등장합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23)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 9,1)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13,30) 그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마르코는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킵니다.

 
사람의 아들은 늘 문 앞에 서서 우리가 당신을 맞아들이도록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가 준비할 태도는 깨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33절)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할지를 문지기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34절) 여기서 기약 없이 집을 떠나 여행길에 나서는 이 집주인은 죽음의 길을 가실 예수님을, 집으로 돌아올 주인은 재림하실 사람의 아들을 가리키며, 집은 교회 공동체를, 종들은 공동체에 책임을 맡은 제자들을 암시합니다.
문지기는 밤에도 깨어 있으면서 행여 돌아올 집주인을 기다립니다. 문지기는 집주인이 언제 올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35절) 그리스도가 밤에 재림하실지 모른다는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문지기가 할 일은 주인을 영접하기 위해 깨어 있는 일입니다.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것도 깨어 있는 것이지 잠을 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힘겹게 기도하실 때도 제자들이 자신과 함께 깨어 있어 주길 바라셨지만 그들은 잠에 빠졌습니다.(14,32-­42) 결국 제자들은 앞으로 닥칠 일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종말의 때’를 동경하면서 그때를 계산하는 따위의 열광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때를 기다리는 삶입니다. 종말은 해가 바뀌듯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 원하시는 방식으로 올 것입니다. 종말이 오히려 구원이 성취되는 때임은 분명합니다. 구원을 확신하고 고대한다면 그때를 알 수 없다 해도 깨어 기다리는 것이 힘겹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자기의 사명에 충실하면서 사람의 아들이 오실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갑자기 돌아오신 주님께 저마다 맡은 사명과 책임을 얼마나 충실히 수행했는지 보고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은 문지기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많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잠을 자듯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깨어 있는 존재, 곧 기다리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한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실 분을 통해서 말입니다. 충실히 주인을 기다리는 마음이 없으면 구원 기회를 놓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의 문 앞에 오시어 고요를 깨울 것입니다. 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주인만을 고대하는 신앙 태도를 당부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문지기이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어오려고 문 앞에 서 있는 모든 생각에 대해, 그것이 우리에게 속한 생각인지, 유익한지 해로운지를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생각인지 오염된 세상에 안주하려는 생각인지는 깨어 있어야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깨어 기다리는 자에게는 종말이 희망의 시간입니다. 주인을 맞을 생각에 설레어 잠이 오지 않습니다. ●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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