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12.3 수요일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1506-1552) 축일
1코린9,16-19.22-23 마르16,15-20
"자유의 종"
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땅에서 살다가 땅에서 죽어 흙에 묻히는 인간의 운명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수확으로 끝난 것 같았던 배농사가
곧 이은 전지로 또 배농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어제는 마침 배 밭에 둘러 일꾼들의 식당인 봉사자 집에 들렀다
바쁘게 식사 준비를 하는 착한 자매를 만났습니다.
저도 모르게 튀어 나온 말입니다.
“먹어야 일하는 군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는 일꾼들,
아침과 저녁은 집에서 먹지만 일하는 도중
10시에 간식, 12시 점심,
오후 1시쯤 술에 안주,
오후3시 반쯤 간식,
무려 네 번을 잡순다 하니,
아침 점심을 포함하여 하루 여섯 번을 잡숫는 것입니다.
정말 먹어야 땅에서 몸으로 일할 수 있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러다보니 땅에서 몸으로 먹고 일하는 것이 전부인 듯 생각됐습니다.
먹기 위해 일할 수뿐이 없고,
일하기 위해 먹을 수뿐이 없는 게
땅에서 사는 인간 몸의 고달프면서도 정직한 현실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아닌
“먹고 일하라.” 가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땅에서 몸으로 먹고 일하는 것이 삶의 전부일까요?
한 번뿐이 없는 유일한 선물인생,
몸으로 먹고 일하는 것에 올인 해야 하는 인생일까요?
오늘 아침 찬미기도 내용이 새롭게 와 닿았습니다.
“땅아 주님을 찬미하라. 산과 언덕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바다와 강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고기와 물에 사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하늘의 새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짐승과 가축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사람의 아들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이스라엘아 주님을 찬미하라.”
이래야 땅과 시간의 성화입니다.
땅에서의 모든 피조물들을 하느님 찬미에 합류시킬 때
땅은 거룩해져 하늘이 되고 영원성을 띠게 됩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먹든지 일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살아도 결코 잊어선 안 되는 하늘이요 하느님입니다.
바로 이래서 주님의 유언과도 같은 복음 선포 명령입니다.
땅에서 몸으로 먹고 일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에서도 하늘을 살라는 말씀이요,
먹고 일하면서도 늘 하느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세상에 활짝 개방하여 복음을, 좋으신 하느님을,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려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새삼 복음 선포의 사명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자 존재이유임을 깨닫게 됩니다.
땅에서 몸으로 먹고 일하는 게
인생 전부가 되지 않도록 영혼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을 심어주고,
기도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맛들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밥맛, 술맛 등 먹는 맛만 아니라
기도 맛, 말씀 맛, 등 하느님 맛을 들이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땅에서 하늘을 담고 살아가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육적인간에서 영적인간으로의 전환입니다.
세례성사로 육적인간에서 영적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들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니,
육적인간도 있고 영적인간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복음의 믿는 이들에 따르는 이적들,
구마이적, 언어이적, 독사이적, 치유이적, 음독이적
다섯 가지 이적들 모두 내적으로 변화된 영적인간임을 보여줍니다.
수도승을 하느님만을 찾기 위해 세상에서 떠난 자라 하는 데,
복음은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 하니 참 모순처럼 들립니다.
세상에서의 떠남과 세상에의 파견,
건강하고 창조적인 긴장 관계에, 균형관계에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세상에서의 떠남 자체가,
세상에의 파견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
하느님이, 복음 선포가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미사의 구조가 이런 진리를 생생히 입증합니다.
세상을 떠나 하느님과 일치의 미사 후
하느님을 전하러 세상에 있는 삶의 자리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세상을 떠나면
저절로 세상을 향해 개방하기 마련입니다.
물이 차면 넘쳐흐르고,
그윽한 향기가 퍼져나가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찾을 때
세상에서 떠남과 동시에 세상에의 개방입니다.
세상을 떠나면 떠날수록
세상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고,
하느님과 일치할수록
세상 모든 이와 일치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찾아 세상을 떠난 만큼
세상 가까이 이른다는 게 역설의 진리입니다.
모두와 일치되기 위해 모두를 떠난 수도승이라 합니다.
이래서 안에서 보면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이고
밖에서 보면 하느님을 전하는 선교사입니다.
수도승과 선교사의 구별이 있을 분,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닌 한 실재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수도승 따로, 선교사 따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수도승은 좋은 선교사일 수뿐이 없고,
좋은 선교사는 좋은 수도승일 수뿐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이런 수도승과 선교사의 일치의 모델이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먹고 살기위해 두 손이 부르트도록 일했고
복음 선포의 삶에 전력투구, 올인 했던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복음 선포의 삶이 그의 존재이유이자 삶의 목표였습니다.
먹고 일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이었고
그의 목표는 하느님을 전하는 복음 선포 하나였습니다.
다음 바오로의 감동적인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복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스스로 모두의 종이 된 자유의 종, 사랑의 종 바오로 사도,
수도승은 물론 모든 믿는 이들의 모범입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참 영성의 절정입니다.
약한 자는 약한 자대로,
모두의 눈높이에 맞춤으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자기가 사라진 온전한 사랑은
수도승과 선교사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들의 궁극목표임을 깨닫습니다.
좋으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사는 우리와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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