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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11 조회수513 추천수6 반대(0) 신고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 ... 윤경재


  가톨릭교회에는 성경을 읽는 방법으로 전통적으로 Lectio Divina(영적독서) 라는 방법이 있었다. 이 영적독서 방법은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최종 목표인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고자 관상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성경 독서로 시작하는 방법이다. 즉, 하느님 말씀을 통해 하느님과 만난다는 목표를 이루려는 방법이다.

  이 거룩한 독서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수도승의 역사와 함께하며,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시작되었다. 이 방법은 네 단계 곧 lectio, meditatio, oratio, contemplatio의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각 단계는 반드시 순서대로 오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순서가 바뀔 수도 있다. 이 전부를 아울러 Lectio Divina 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단순한 성경을 읽는 방법이 아니라 성경 읽기를 통해 하느님께 이르고자 기도드리는 것이라 보면 틀림없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지금, 여기서(Nunc et Hinc) 이루어지는 우리의 응답이 바로 이 거룩한 독서를 통해 완성된다.


 1) 읽기 lectio 단계

  거룩한 독서는 그 목적이 하느님과 “관계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읽기 단계는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만나러 가는 단계라 하겠다. 내 생활에 공간을 만들고 시간을 마련하는 단계이다.

  읽기의 대상은 주로 성경이 된다. 그러나 영적 스승들이 저술한 영성에 관한 책도 가능하다. 이것은 흔히 생각하는 평범한 독서가 아니다. 오히려 “귀 기울임”이다. 몸도 바른 자세(定座)를 갖추고 마음도 정결하게 가다듬어 온 정신과 마음을 집중하여 나를 부르시는 그분께 귀 기울이는 자세로 본문을 천천히 음미하듯 읽는다.

  가능한 길지 않은 단락을 읽되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본다. 마음에 와 닿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읽기를 멈추고 눈 감은 채 그 뜻을 음미해 본다. 이 특별한 구절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말씀은 비로소 살아 있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2) 묵상 meditatio 단계

  묵상은 자신을 멈추게 하였던 단어나 사건들 안에서 이끌어낸 주제를 가지고 개인적 의미나 도덕적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성찰하며, 이성적 추리 과정을 거쳐 심화해 보는 단계를 말한다. 즉, 상상력을 통하여 그 말씀 안에 들어가서, 본문 속 인물들을 만나고, 보고, 듣고, 체험하여 자신과 동일시해 보는 것이다. 그때 말씀이신 그분을 뵐 수 있게 된다.

  본질적으로 하느님은 우리와 다른 언어체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인간의 유한한 지성과 이해로는 그분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하느님께서 말씀을 육화하시어 우리가 알아볼 수 있도록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드러난 하느님이시다. 또한, 예수님은 아버지께 돌아가실 때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성령은 우리의 내부에 머무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기도해주신다. (로마 8,26)

  묵상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직접 들어가 그 말씀과 더욱 친밀하게 해주며 그분을 향한 사랑을 키워준다. 사랑과 섬김으로 부르시는 예수님께 어떻게 응답할지 성찰하게 한다. 이때 많은 묵상서의 안내가 도움을 준다.


 3) 기도 oratio 단계 또는 적용 applicatio 단계

  묵상은 하느님에 관한 우리의 지적 활동과 상상이므로 이 차원에만 머물면 참된 기도에 도달하지 못한다. 묵상이 깊어지면 나중에는 인간의 지적인 추리와 사고가 점점 줄어들게 되고 마음속에 하느님을 향한 단순하고 뜨거운 사랑의 열망이 솟아나게 된다.

  이것이 친밀한 내적 대화의 형태를 지닐 때, 하느님을 ‘아주 가깝게 그러나 아직은 멀게’ 느끼면서 그분을 소리쳐 부르게 된다. 이것이 기도 단계이다. 이 기도 중에 우리의 마음은 그분께 열리고, 그분의 빛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기도 중에 그분께서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우리가 올리는 기도가 진실하지 못한 것이다. 이 기도의 단계에서 우리 안에서 ‘거룩한 열망’이 증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끔 이 단계에서 다시 읽기의 단계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관상의 단계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짧고 상징적 구절로 되돌아가야 한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위의 구절처럼 익숙하고 아름다운 구절이 좋다. 이 단계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고 있다.


  4) 관상 contemplatio 단계

  지금까지의 세 단계는 아직도 우리의 활동이 지배하는 단계이다. 무엇인가 우리가 직접 노력하는 단계이다. 앞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부터는 <하느님 안에서 쉬는> 단계이고, <애정 어린 응시>, <황홀한 주의>, <앎을 넘어선 앎>의 단계가 된다.

  그러나 이 단계는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여기서부터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본능적 감각기능을 폐쇄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자리가 점점 더 커진다. 이때 우리의 느낌은 어둠으로, 구름 속을 거니는 것으로 느낀다. 우리의 육체적 감각은 더는 설 자리가 없다. 내적 갈증을 더 크게 느낄 수도 있다.

  이 단계의 특징과 우리가 제대로 목표를 향하는지 알아보는 식별은 어떤 어려움에도 지속적으로 기도와 관상에 머물 수 있다는 데 있다. 악마의 유혹은 우리가 기도를 지속하지 못하게 만든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관상을 계속하는 것이 유혹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거짓 자아를 깨버리고 참 자아, 거룩한 하느님의 현존, 성령과 일치하는 변형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 체험은 영원한 일치, 즉 지복직관을 이루기 전까지 이승에서는 끝나지 않는 단계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 몸은 당신 안에 쉬기까지 안식을 목말라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렉치오 디비나는 첫 단계인 읽기 단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네 단계를 모두 아우르는  명칭이다. 이 독서 방법은 처음에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방향에서 우리가 자신의 의도를 갖고 말씀을 대하다가, 결국에는 반대 방향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그 말씀을 보게 된다. 바로 내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가 우리를 조절하는 단계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방법이 있을 수 없다. 그 사람에 알맞게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영성 스승에 따라서는 기도 oratio 단계를 적용 applicatio 단계라 부르며, 자기 삶에 적용하는 단계를 넣기도 한다.

 

  * 참고 ; 그동안 묵상과 관상이라는 용어에 자주 혼란이 있었다. 예를 들면 로욜라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말하는 관상은 묵상의 범위를 포함하는 내용이다. 이런 까닭은 아마도 당시 시대 상황에서 관상하기를 주장하다가는 이단이라 몰릴까 염려하고, 오해를 피하고자 관상을 확대하여 해석한 듯하다.

  또한, 다른 종교나 동양의 명상방법을 관상으로 오해한 예도 많다. 그 경우 대개 묵상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묵상은 기도자의 상상력, 지성 등 인간 주도적 방법이고, 관상은 그것보다 하느님의 주도를 강조하는 의미로 알아듣는 것이 옳다.     

  근년에 와서 ''침묵의 기도'', ''향심기도'', ''관상기도''라고 하는 기도 방법이 있는데, 이들은 거룩한 독서를 현대인의 정서에 맞게 바꾸고, 현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붙여 하느님과의 일치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한 기도 방법이다.

  향심기도에서는 특정한 낱말을 key로 삼아, 분심들 때 그 단어를 기억해내어 망상과 분심을 없애고 내적 침묵으로 몰입하게 해준다. 이때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상의 흐름도 자연스럽게 끊어 버리고 오직 “하느님 안에서 쉼” 만을 이루려 노력해야 한다.

  그 결과 우리 안에 쌓여 있던 온갖 장애와 찌꺼기가 사라지고, 우리가 참으로 알아 왔던 거짓 자아가 저절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씩 사라지고 점점 순수한 신적 현존만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게 된다고 말한다. 이런 기도의 특징은 시간이 걸린다는 데 있다. 이론이 아니고 실제 몸으로 체험되고 체득하여야 한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날마다 종말인 것처럼 진지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데 그 뜻이 있다.

  그러나 이 기도 방법을 지난 세기에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 수행하는 방법인 줄로 오해하고 있었다.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라도 이 기도를 수행할 수 있다. (심지어 타 종교인도 가능하다고 향심기도의 창시자인 토마스 키팅 신부는 말한다.)

  이 기도의 목표는 우리가 도달하리라고 상상하는 관상차원이나 신비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오해와 화해와 같은 온갖 삶의 과정을 통하여 하느님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데 있다. 그분과 하나 되는 사랑의 성장을 살아가는 데 있다.

 

 

 * 참고 ; 이런 관상기도의 수행을 마치 땅에서부터 천국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실제 어떤 단계가 차례대로 줄지어 오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영적 스승들이 표현하는 각 단계의 모델은 이를테면 그렇다는 설명방법일 뿐이다. 대 테레사의 ‘영혼의 성’에서 표현하는 일곱 궁방을 어떤 단계로 알아들을 필요가 없다. 또 기도의 9단계 등과 같은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경우엔 사도 바오로처럼 한 번에 예수님을 뵈올 수도 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방법에 맡겨야 한다. 예수님만을 스승으로 모시고(마태 23,8) 이끌어 주시길 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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