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낙타와 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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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8-12-16 | 조회수469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복음: 마태 21,28-32
"낙타는 사람을 배신하는 짐승이라서, 수천리를 걷고도 지친 내색을 않다가 어느 순간 무릎을 꺾고 숨을 놓아버리지. 하지만 말은 서서히 지치는 동물이야. 앞으로 얼마나 더 달릴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쯤 죽을지 가늠할 수 있다네"
항상 부모의 애를 태우며 불안하게 만드는 자식이 있다. 대개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자식은 평소에는 예상치 못한 범생이 녀석이다.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항상 투덜대며 토를 달면서도 목적지를 가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한치의 빈틈도 없이 곧은 길을 가다가, 어느날 홱 돌아서는 자녀도 있다.
전자는 오늘 복음의 맏아들 같고 후자는 둘째아들 같다. 전자는 세리나 창녀 같고, 후자는 수석사제들이나 백성의 원로들과 같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맏아들은 대개 세속에는 强者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패자로 나오고, 둘째아들은 세상의 눈으론 弱者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최후의 승자로 나온다. 그러나 이 '정석'도 마태오 복음, 이 대목에서만은 깨어지고 만다.
그래서 어떤 성서학자들은 이 비유가 맏이와 둘째가 바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바뀐 이유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의외성'이 이 비유에서 돋보이는 요소라 생각된다. 곧 '으레 그러려니' 하던 것에서 생각을 돌리라는 것이다.
마치 대답은 "예! 예!" 하며 고분고분하지만, 뒷통수 치는 사람은 바로 그 순종적인 사람일 수 있다는, 그런 '의외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듯이...
겉으론 매사에 열심한 신앙인 같지만, 눈앞에 이득이 보이면 바로 배신을 할 수 있는 사람도 그런 '의외'의 인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막 신앙에 불붙은 사람들을 보면 무섭게 여겨질 때가 많다. 누군가 미지근한 소리를 하면, 바로 손가락질을 한다. 그렇게 희미한 것은 신앙이 아니라고 공격한다.
신앙의 내용에 의문을 개진해도, 교회의 방식에 조금만 불평을 해도 믿음이 없는 사람 취급을 해서 주눅들게 하고 사랑이 없는 사람 취급을 해서 죄책감을 심어준다.
전사처럼 보이고, 투사처럼 보이는 그런 사람들 앞에서 신앙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은 도통 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 걸었던 험난한 길을 따르는 우리. 어찌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올곧게 갈 수 있겠는가? 어찌 투덜대는 일 없이, 의심하는 일 없이, 갈팡질팡 하는 일 없이 줄기차게, 신실하게 신앙할 수 있겠는가?
주저하며 행하는 것보다 덥석덥석 임하는 것이 좋겠지만,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했다.
시원치 않은 응답을 하고 있던 아니던, 중간에 이리저리 방랑을 했던 안 했던, 중요한 것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그분과 함께 끝까지 길을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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