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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43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19 조회수561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대림 제 3주간 금요일)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5

 5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6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7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8 즈카르야가 자기 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의 일이다. 9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다. 10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11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섰다. 12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13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15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16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17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18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19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20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21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22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23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24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25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 요한의 탄생에 관한 복음으로 4복음서에 모두 세례 요한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세례 요한은 태산준령 같은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넘어야 할 산은 '세례 요한보다 예수님이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민중들에게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 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홍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 요한을 흠집 내는 방법이 있고, 두 번째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호의적으로 설정하여 예수님을 홍보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네가티브 방법이라면 후자는 포지티브 방법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복음서 기자들은 후자를 선택하여 윈윈전략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하였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전임자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아주 편협 된 사고가 만연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당시 사람들에 비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겠지만 지혜는 오히려 퇴보되고 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하여 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오늘 배워야 할 것은 전임자의 공로를 인정해야 하는 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세례 요한을 흠집 내기를 시도했다면 저희들이 지금 예수님의 이름이나 기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아마 제자들이 윈윈전략을 채택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 그리스도교는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자기가 잘나서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독불장군은 존재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사람 인(人)자는 서로가 관계를 맺고 있는 형상으로, 서로 의지하며 지탱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의 탄생에 관한 신화적 요소까지 동원하여 세례 요한을 배려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전통중 하나는 앞선 선지자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나가는 예언자 전통입니다. 전임자의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린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이상 앞으로 전진 하지 못하고 다람쥐 채 바퀴 도는 꼴이 될 것입니다. 아니 다람쥐 채 바퀴 도는 형국이 아니라 오히려 뒷걸음치며 퇴보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계셨기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앞서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예수님 당신도 없었다는 의미로 성경을 인용하여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말라 3,1) " 말씀하셨습니다 (루카 7,27). 세례 요한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 되고 뒤에 오는 다른 사람이 예수님이 되었을 것입니다.

앞 사람이 길을 개척해 줬기에 내가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임을 모르고 내가 잘 나서 그 길을 가는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삶 인 듯합니다. 눈 덮인 산길을 산행하며 절실히 느낀 점은 앞 사람들이 길을 개척해 주웠기에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를 모르고 무모하게 산행을 하다가 죽음 직전까지 갔던 지난 기억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너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너도 존재해야 한다.’ 사실을 오늘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양식를 얻어야만 복음이 비로소 복음이 될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신앙적 관점을 떠나서는 묵상할 소재를 찾기가 어려운 복음이지만 세례 요한을 배려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뜻하지 않은 소중한 양식을 얻은 기분입니다.  

대자대비 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관계 속에서 상생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는 주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잘못된 사고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들이 이 땅에서 더 이상 활개 치지 못하도록
성령님의 지혜로 저희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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