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대안학교와 사관학교 | |||
---|---|---|---|---|
작성자김용대 | 작성일2008-12-27 | 조회수517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오 21:23-27)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수석사제와 평신도의 위상(位相)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부자들이나 유명한 사람들에 대한 값싼 설명을 제외하고
보통 사람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의 특수한 문학이다.
훌륭한 이야기는 모든 사람의 삶에 빛을 비춰준다.
윌라 캐더(Willa Cather)가 말했듯이
“세상에는 단지 두 세 개의 이야기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마치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반복되고 있다.”
우리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와 같이 세상의 변화를 느끼는
우리 세대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두 세 가지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 이야기는 호감이 가고, 공감(共感)이 들고, 논리에 어긋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신비주의 같은 것이 있어서
마치 내 자신이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같은 경험을 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보편적인(catholic) 이야기로 알아 듣는다.
그리하여 데자뷰(déjà vu, 旣視感)같이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고작 두 세 개 밖에 되지 않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세상을 온통 혼란으로 만들고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을 파괴하고 있다.
평신도나 비 신앙인은 평범한 사람들로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과 같다.
이른바 문제(?) 아동들인 셈이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들이다.
어쩔 수 없이 성(聖)과 속(俗)이 화합을 이루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문제는 장교들이 대안학교 학생들을 어떻게 이끌고 가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수석사제와 같이 대안학교 학생들에게 정규과정을 가르치면 따라갈 수 있을까?
우리 인간은 우매(愚昧)하여 고통을 겪지 않고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
가르침을 받아서 진리를 터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대안학교 학생들은 지금 고통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화가이며 강론가인 맥킨지(E.C. McKenzie)가
“교회가 무릎을 꿇지 않으면 서 있을 수 없게 된다.”고 한 말은
성직자들이 대안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라는 이야기인 것 같다.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는 갑자기 성령이 임하여 성령이 인도하는 것이고,
돈오점수(頓悟漸修)는 고통을 통하여 몸소 진리를 터득하는 즉 성령을 받는 과정인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