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8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Over all these put on love,
that is, the bond of perfection.
(Col.3.14)
제1독서 집회서 3,2-6.12-14
제2독서 콜로새 3,12-21
복음 루카 2,22-40
어떤 선생님께서 시골 마을로 새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은 시험 보는 날이었지요. 선생님께서는 “너희는 정정당당하게 자기 실력으로 답을 쓰도록. 절대로 남의 것을 보거나 보여 주면 안 된다. 알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이 시작되고 얼마 안 돼 두 아이가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더니 금세 아이들이 한곳에 모여 이 문제의 답이 이것이다, 아니다 하며 시끌벅적하게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것도 시험 감독을 보는 선생님이 앞에 있는데도 말이지요. 그래서 시험 시간에 이게 무슨 짓이냐고 호통을 쳤지요.
그러자 한 소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 이장님께서는 늘 말씀하셨어요.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겪게 될 텐데, 그럴 때마다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여럿이 지혜를 모아 해결하라고요. 오늘 시험 문제를 풀다 보니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이장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한 것뿐이에요.”
이 학생들의 행동이 올바를까요? 그렇지 않은 것일까요? 사실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풀었을 때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남과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공유하기보다는 그저 자기 자신이 최고가 되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뭐든 경쟁해서 최고가 되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나라간의 경기에서도 이겨야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지면 그 순간부터 역적이 됩니다. 올림픽에 나간 선수의 땀방울을 생각하기 보다는 금메달 숫자가 어떻게 되고, 그래서 순위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더 큰 관심입니다.
얼마 전, 성당 마당에서 우리 성당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이 품에 커다란 책이 한권이 안겨 있는 것이에요. 저는 무슨 책을 보는지 궁금해서 “무슨 책이니?”하면서 아이의 책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가 보는 책은 대학생들이 보는 토플책인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 책 안의 문제들을 거의 다 풀었더군요. “이 책이 이해되니?”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만 “모르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거의 다 알 것 같아요.”라고 답을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 대부분이 토플을 공부한다는 것이에요.
저는 초등학교 들어가서야 한글을 떼고, 학원을 다닌 적도 없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동네 공터에 가서 아이들과 노는 것이 저의 주 일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요즘 아이들처럼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후회를 할까요? 저는 그때의 삶이 전혀 후회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떼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또 학원 다니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갖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공부하기보다 놀은 것에 대해서 시간 낭비했다고 억울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저에 대해서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아이들처럼 저를 달달 볶지 않았던 부모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점점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커지는 요즘입니다. 그런 가운데 함께 하는 기쁨은 점점 없어집니다. 또한 그렇게 경쟁만을 최고로 따지다보니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하게 되고, 그 결과는 가정의 해체로까지 이어집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께서 함께 사셨던 가정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가정이셨기에 우리가 이 가정을 본받고 따라야 한다고 할까요? 지금 우리 사회처럼 최고가 되기 위해서 각 구성원들이 노력했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어도 서로를 위한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성가정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이고, 우리도 이 가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랫말이 있습니다.
좋은 곳에 살아도 좋은 것을 먹어도 당신의 맘 불편하면 행복이 아닌 거죠.
웃고 있는 모습에 행복한 것 같아도 마음속에 걱정은 참 많을 거예요.
사람도 나무처럼 물을 줘야 하는데 가끔씩 난 당신께 슬픔만을 줬어요.
너를 사랑한다고 수없이 말을 해도 내가 내 맘 아닐 땐 화낼 때도 많았죠.
세상사는 게 바빠 마음에 틈이 생겨 처음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지만
이 세상의 무엇을 나에게 다 준대도 가만히 생각하니 당신만은 못해요.
사랑해 난 널 사랑해 사랑해 난 널 사랑해.
바로 당신만은 못하다는 생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이 노래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가정 안에서 가득하다면, 이런 마음이 직장 안에 가득하다면, 이런 마음이 사회 안에 가득하다면, 또 이런 마음이 우리 교회 안에 가득하다면……. 바로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이루었던 성가정인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이제 2008년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만은 못하다’는 생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겠다는 다짐을 해보도록 합시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가정에서 누리는 행복은 모든 소망의 최종 목표다.(S.존슨)
거울 효과(‘행복한 동행’ 중에서)
미국 몬태나대학교 아서 비먼 교수는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할로윈데이 때 특별한 분장을 하고 집집마다 사탕을 얻으러 다니는 아이들에게 사탕 바구니에서 하나씩만 가져가라고 말한 뒤 자리를 비울 경우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관한 실험이었다. 그 결과 아이들 중 33.7%가 두 개 이상을 가져갔다.
비먼 교수는 곧이어 또 다른 실험을 했다. 이번에는 사탕이 놓여 있는 탁자 옆에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거울을 배치한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놀랍게도 사탕을 두 개 이상 가져간 아이들은 8.9%로 줄었다. 거울이 바람직한 행동을 유도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좀 다르다. 우리나라 각 지역에서 쓰레기가 상습적으로 무단 투기되는 곳에 양심 거울을 설치했더니, 초기에만 잠깐 줄어들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당신이 버린 양심, 거울은 알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까지 표시했지만 바람직한 행동을 유도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왜 결과가 달랐을까?
두 상황의 결과가 다른 이유는 실험과 현실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아이와 어른 사이에 존재하는 ‘양심’의 차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거울은 감시하는 도구가 아니다. 우리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잘 빗었는지, 옷매무새가 괜찮은지, 얼굴에 뭐가 묻진 않았는지 겉모습을 가꾼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사탕 하나를 더 갖고 싶은 마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어른들은 거울을 보고도 느끼지 못했다. 어른들은 거울을 보며 겉모습만 보았지만 아이들은 속마음까지 본 것이다. 어쩌면 어른들은 ‘나쁜 평판보다 양심의 가책을 견디기 쉽다.’는 니체의 말처럼 가책을 느끼고도 모른 척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거울의 진정한 효과는, 거울을 감시하는 도구로 의식하기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양심을 스스로 들여다보게 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동심에 민감하게 반응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젠 거울 속 문구를 이렇게 바꿔 보면 어떨까?
“당신이 버린 양심, 거울에 비친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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