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축복 받은 우리들" - 1.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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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09-01-01 | 조회수651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1.1 목요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 평화의 날)
민수6,22-27 갈라4,4-7 루카2,16-21
"축복 받은 우리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침마다 동녘 하늘에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은 그대로 하느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날마다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햇살 같은 축복을 쏟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오늘은 기축년(己丑年), 소의 해 새해 첫날이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며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호감을 주는 가축을 꼽으라면 소일 것입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모두가 소용되는 소는 사람들에겐 말 그대로 복덩어리 존재입니다.
뚜벅뚜벅 걸어도 천리를 간다는,
우직하고 성실하며 여유 있고 힘 있는 소같이 산다면
웬만한 어려움은 능히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시우행(虎視牛行),
호랑이 눈에 소걸음으로,
깨어 밝은 눈으로 서두르지 않고 한결같은 발걸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늘 축복 받은 우리들임을 상기하십시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축복자체이십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랑의 복을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유일한 낙이자 기쁨입니다.
오늘 이 거룩한 대축일 미사를 통해 주님은 여러분을 축복하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시고, 여러분을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여러분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평생 살아오면서 하느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고 있는지요. 매일 미사와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우리들은 말 그대로 축복덩어리입니다.
축복 받은 존재, 바로 이게 우리 믿는 이들의 정의입니다.
이런 우리의 축복은 저절로 이웃에게 전달되어
이웃을 기쁘게 평화롭게 행복하게 합니다.
미국의 어느 아빠스님 편지의 한결같은 서두 말씀이 생각납니다.
“Blessings to you(여러분에게 축복을)”
아마 분명 이 아빠스님은 모두를 축복하는 마음으로 살 것입니다.
이웃에게 부단히 축복을 나누는 삶,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하겠는지요.
가진 것이 없어 줄 것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가득한 우리의 삶 자체가
이웃에게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느님의 축복에 따른 자연스럽고 당연한 응답이 찬미와 감사입니다. 진정 믿는 이들의 유일한 기쁨은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입니다.
또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때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축복에서 찬미와 감사요,
찬미와 감사에서 축복이니 이래서 영적부요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목자들이 그 모범입니다.
외관상으로는 가난했지만 내면은 누구보다도 부자인 목자들이였습니다.
주님의 천사들의 축복을 가득 받은 목자들,
즉시 축복에 감사로 응답하여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를 찾습니다.
“그때에 목자들은 베들레헴에 서둘러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찾았다.”
다시 구유에 있는 아기 예수님의 축복을 가득 받는 목자들입니다. 구유에 있는 아기 예수님은
오늘 역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을 축복하십니다.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 역시 감사의 고백입니다.
“진정 우리는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세상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온갖 근심, 걱정, 탐욕, 운명의 사슬에 매여
세상의 종으로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드님의 영을 지녔기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세상의 종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인으로서의 살 수 있습니다.
이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하느님의 축복에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로 응답합니다.
늘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하십시오. 진정한 관상가인 우리 성모 마리아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름은 너무 당연합니다.
우리 역시 관상적 삶을 통해 부단히 하느님을 낳습니다.
‘하느님을 낳는다.’는 말은 부단한 영적 깨달음을 상징합니다.
관상적 깨달음을 통해 날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내적 삶이요,
하느님을 닮아 신화(神化)되어
마침내 우리의 참 자아인 그리스도께 이르게 됩니다.
내적으로 빈곤하고 빈약할 때 눈에 보이는 밖으로 향하기 마련입니다.
하여 부수고, 뜯고, 허물고, 짓고, 모으고, 쌓고, 낭비하고...
날로 천박해지는, 얕고 가벼워지는 현대인들입니다.
보이는 것 넘어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를 볼 수 있는 능력도
점차 상실되어 가는 현대인들입니다.
영혼은 없고 욕망만 가득한 사람들 날로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바로 이게 관상가의 면모입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매사 예사로 보아 넘기지 않고 곰곰이 되새기며
그 숨은 의미를,
하느님의 신비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요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님 진정 성독(Lectio Divina)의 대가입니다.
말 그대로 내적부요의, 하느님 존재에 깊이 뿌리내린 삶입니다.
목자들 역시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 갔다하니
참 관상 신비가임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은 축복 자체이십니다.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유일한 기쁨입니다. 새해 첫날, 좋으신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천주의 모친 대축일 미사를 통해 햇살 같은 축복 가득 쏟아 주십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활짝 열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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