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5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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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순 | 작성일2009-01-07 | 조회수58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오늘의 묵상입니다. [페냐로르트의 성 라이문도 사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45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인생길을 흔히들 항해에 많이 비유하기도 합니다. 항해를 하다보면 잔잔한 호수와 같은 때도 있고 험한 풍랑이 몰아칠 때도 있습니다. 산길도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듯이 우리 삶도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고비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고비를 극복해 나가는 주체는 언제나 우리 자신이고 고난을 극복하는 올바른 방향 설정은 언제나 주님의 가르침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비단 고난을 당했을 때뿐만 아니라 순항 중 일 때도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나침반으로 삼아서 항로를 이탈하지 않도록 늘 자신을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가톨릭 호에 탑승하여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강 건너 저편을 가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는 것은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건너가는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이 언덕을 차안(此岸)인 고통스러운 중생의 세계로, 저 언덕인 피안(彼岸)은 더없는 행복의 세계인 깨달음의 세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 땅(此岸)에서 홍해바다를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彼岸)으로 민족을 이끌고 간 것은 그곳이 약속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현실의 고통(此岸)속에서 하느님의 나라(彼岸)로 우리를 인도하시려는 것도 하느님의 나라에는 삶의 고통이 없는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가톨릭 호에 승선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호에 승선하였다고 저절로 저 언덕으로 데려다 주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 스스로가 복음의 노를 저어가며 방향을 잃지 않도록 주님의 별을 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합심하여 노를 저어나가지 않으면 맞바람을 이겨내며 강 건너로 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가 노를 젓는 것을 불가에서는 자등명(自燈明)이라 하며, 주님의 별을 보고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을 법등명(法燈明)이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맞바람'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기위해서는 모진 박해를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박해를 이겨내는 것은 오직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씀을 명심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이 말씀은 自燈明으로, '나다' 하신 이 말씀은 法燈明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 일수록 더 더욱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세계 종교가 된 것은 에듀어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의하면 박해를 받아도 무기를 들고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점을 높이 산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종교의 제국을 다스려야 하는 현명한 통치자 입장에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 44)를 실천하는 그리스도 교인들을 칭찬하지는 못 할망정 박해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여기에 덧붙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한다면, 그 복잡한 교리나 복음서의 한 구절을 몰라도 우리는 무사히 호수를 건너서 피안의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아빠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든든한 하느님이신데 아직도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전지전능하신 아빠 하느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는데 풍랑이 일고 유령이 나타난들 두려울 것이 뭐 있겠습니까?...우리는 아빠 하느님의 빽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말고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복음의 노를 저으며 항해를 계속해 나아가야 함을 묵상하였습니다. 대자대비 하신 아빠 하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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