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1.10 주님 공현 후 토요일
1요한5,14-21 요한3,22-30
“그분은 커지셔야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겸손한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마음의 겸손에서 배어나오는 내적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이런 겸손의 덕은 주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만이 가능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더불어 깊어지는 겸손의 덕입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우리는 오늘 새벽 독서의 기도 시
시편136장 1-26절까지 계속 위의 후렴을 반복했습니다.
끊임없이 진심으로 주님의 자애를 찬양할 때
저절로 감사의 마음이요 겸손입니다.
어느 스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감사하고 미소짓고 침묵할 때 저절로 행복해진다.”
저는 말을 바꾸어,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미할 때 저절로 행복해진다.”
라고 하고 싶습니다.
결론은 둘 다 똑같이 겸손의 행복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전 서울 시장에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조 순 씨의 제자 전 서울대 총장이었던,
한 때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올랐던 정 운찬 씨에 대한
인터뷰 기사도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정 운찬 전 서울대 총장은 제자이지만
인품이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군자지교담여수(君子之交淡如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의 사귐은 물과 같아 담담하다는 의미인데
정 전 총장과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사제(師弟)관계,
부부관계,
친구관계,
수도자들의 관계 등
모든 관계의 성숙된 도반 관계의 이상은
‘물과 같이 담담한(淡如水)’ 사랑의 관계일 것입니다.
아무리 마셔도 질리지 않고 늘 새롭고 좋은
담담한 생수와 같은 무욕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과 세례자 요한의 관계가 바로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 수도자들의 영원한 겸손의 모델입니다.
아침 성무일도 시 지혜서의 한 구절도 생각납니다.
“지혜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거룩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들을 하느님의 벗이 되게 하고 예언자가 되게 한다.”
바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 진정 자기를 안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알았고 참 자기를 안 무욕의 겸손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전갈에 범인 같으면 질투에 휘말릴 법도 한데
세례자 요한의 반응이 너무나 담담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겸손한, 훌륭한 인품의 세례자 요한인지요.
욕심이 없어 하늘의 뜻을 알았고
주님과의 관계에서 참 자기를 안 겸손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다음 세례자 요한의 말씀은
오늘 복음의 백미이자 우리가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내 기쁨은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렇게 주님만 커지도록하고
형제들은 모두 작아지기 경쟁에 진력하는 겸손한 공동체라면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답겠는지요.
주님은 점점 커지고 나는 점점 작아질 때
샘솟는 참 기쁨이요 또렷해지는 참 나의 정체성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라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고백, 우리 모두 평생 영성수련의 목표입니다.
이런 겸손한 사람들은 1독서에서
요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끊임없이 주님은 커지시고 우리는 작아짐으로
새롭게 하느님에게서 태어나는 복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실감하는 미사시간입니다.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를 모시는
복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