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서 요한의 선포가 있고,
뒷 부분에 하느님의 선포가 있다.
그 중간에 예수님의 세례장면이 들어가 있다.
먼저 요한이 선포한 내용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시는데,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물의 세례는 몸을 깨끗하게 하는 뜻이 강하지만
성령의 세례는 몸의 정결과 상관없이,
몸의 정결보다 더 정결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성령의 세례다.
그것은 사람을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히게 하는 힘이다.
성령의 힘은 세상을 창조하는 힘(창세 1,2),
사람을 새로 나게 하는 힘이다(요한 3,5)
성령의 세례는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는 힘,
한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드는 힘,
그래서 성령 세례는 완전히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는 힘이다.
그렇게 우리는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이다.
요한이 준 물의 세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물의 세례를 받은 것은
이 성령의 세례를 주기 위한 준비작업 이었다.
그분이 물의 세례를 받자마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그분위에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하늘이 갈라지게 하였다.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을 가로막고 있던 장막이 갈라진 것과 같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과 같다.
그것은 죄 많은 이 세상에 새로운 하늘을 열어주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하느님과 인간을 가로막고 있던 장막은 하늘이 아니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께서 우리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므로
당신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잃은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구약성서, 이사 63,19)
하느님과 인간을 가로막고 있던 장막은 하느님께서 다스리지 않기 때문,
즉 사람들이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부한 때문이란 말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 장막을 거두어 버리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례 받는 예수님,
1독서가 말하고 있는 야훼의 종이 해낸 일이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는 것부터가 벌써 야훼의 종의 모습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모습의 연장이다.
하느님이 사람으로 탄생하실 때,
우리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탄생한 것처럼,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가 받을 세례를 그분이 대신 받음으로써
우리의 죄가 미리 용서의 은총을 받은 것과 같다.
이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 오늘 계시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되듯이,
예수님도 세례를 통해 이름을 계시 받으셨는데 그것은 참으로 영광스럽게도 “아들”이었다.
그것도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 아버지 마음에 드는 아들이었다.
그래서 또 하나 알게 되는 사실,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새롭게 받는 이름도 사실은 예수님이 받은 이름과 같다는 것이다.
베드로 바오로 요한이란 본명은 각자를 구분하기 위한 별칭에 지나지 않고,
실제 우리의 이름도 예수님처럼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친자는 오직 예수님 뿐이지만,
우리의 신앙고백에 따라,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 따라
우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
그분이 사랑하시는 아들이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1독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모습이
우리가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일 것이다.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는 것, 소리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 것,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는 것,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것,
성실하게 공정을 펴는 것이다.
“성실하게” 공정을 펴는 것이라 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한꺼번에 모든 걸 이루려 한다.
단숨에 해결하려는 바람에 더 큰 잘못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공정을 이루기 위한 일에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 역시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일 것이다.(시편 42,1-4)
세례 받은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모습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은 성령을 거슬러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 주셨습니다.”(사도 20,22-23)
사실 예수님은 탄생때부터 이미 십자가 죽음을 품고 계셨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과,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은 것과,
십자가 죽음은 같은 사건의 다른 모습들일 뿐이다.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 안에 새롭게 탄생하는 모습,
그 사람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모습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와 십자가를 닮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탄, 공현, 세례는 그래서 같은 축일이라고 한다.
그 속에 모두 그분의 십자가의 그림자가 공통분모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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