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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의 실재는 유일하다 / 일치의 길 [에로스와 아가페]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3 조회수657 추천수4 반대(0) 신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사건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사랑의 중심점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교신앙은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을 간직하는 동시에 거기에 새로운 깊이와 넓이를 부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므로 (1요한4, 10) 사랑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계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사랑의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모든 형태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하나여서 사랑은 참으로 다양하게 드러나지만 결국 사랑은 유일한 실재인가 아니면 우리는 단지 하나의 낱말을 사용하여 전혀 다른 실재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사랑은 무한과 영원을 약속합니다. 사랑은 우리 일상의 삶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또 전혀 다른 실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본능에 따르는 것만이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는 길은 아니라는 것도 보아 왔습니다. 정화와 성숙이 요구됩니다. 이는 또한 포기의 길을 거칩니다. 정화와 성숙은 에로스를 거부하거나 독살하기 보다는 에로스를 치유하고 그 진정한 위대함을 회복시켜 줍니다.

사랑하는 것은 영혼만도 육체만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통합된 피조물, 곧 인간인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의 두 차원이 진정으로 일치될 때에 비로소 인간은 온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사랑, 곧 에로스는 성숙하여 그 진정한 위대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에로스는 '황홀경'의 상태에서 신에게로 올라가고 우리 자신을 초월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에로스는 상승과 극기, 정화 치유의 길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상승과 정화의 길은 무엇을 내포하는 것입니까?

아가페는 성경에서 사랑의 개념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이 됩니다. '찾아 헤매는' 불확실한 사랑과 대조적으로 이 말은 이전에 풍미하였던 이기적 성격을 뛰어넘어 다른 이를 참되게 발견하는 사랑의 체험을 드러냅니다. 사랑은 더 이상 자기를 찾는 것도 아니고 행복의 도취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사랑은 포기가 됩니다. 사랑은 희생하겠다는 각오이고 바로 그 희생을 찾는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을 바라봅니다. 사랑은 참으로 '황홀경'입니다. 도취 순간의 황홀경이 아니라 자기만을 찾는 닫힌 자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 자기를 줌으로써 자아를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참으로 하느님을 발견하는 여정인 황홀경입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17, 33) 라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에 이르는 당신의 길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것은 곧 땅에 떨어져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이 말씀으로 사랑의 본질과 인생의 본편적인 본질을 밝히십니다. 이것은 당신 자신의 희생과 당신 안에서 완성된 사랑의 원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두 낱말을 숙고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낱말인 에로스와 신앙 안에 뿌리를 박고 신앙으로 형성되는 사랑을 드러내는 아가페입니다. 이 두 개념은 흔히 '올라가는' 사랑과 '내려오는' 사랑으로 대비됩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다른 구분으로 '가지려는' 사랑과 '내어주는' 사랑, 그리고 여기에 때때로 자신만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랑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철학적 신학적 토론에서 이러한 구분들은 종종 명확히 대립될 정도로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이러한 대조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인간의 삶에 근본적인 핵심 관계들과 단절되어 하나의 동떨어진 세계, 인간 삶의 복잡한 구조에서 결정적으로 떨어져 나간 세계가 될 것입니다.

에로스와 아가페 - 올라가는 사랑과 내려오는 사랑 -는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측면의 이 두 사랑이 사랑의 동일한 실재 안에서 올바르게 일치하면 할수록 일반적으로 사랑의 참된 본성은 그만큼 더 잘 실현됩니다. 에로스가 올라가는 사랑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수록 자신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더욱더 추구하게 되며 사랑하는 사람을 점점 더 염려하고 자신을 내어 주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가페의 요소가 이 사랑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로스는 타락하여 그 고유의 본성 조차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한편 인간은 내려오는 사랑,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기도 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생수의 강들이 흘러 나오는 새 물을 끊임없이 마셔야 합니다. 그 원천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창에 찔린 그분의 심장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 나옵니다. (요한 19, 34)

바오로 성인은 하느님의 가장 드높은 신비에까지 들어 올려졌다가 다시 내려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여러 번 장막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장막 밖으로 나왔을 때 그의 백성에게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은 서로 다른 차원을 가진 하나의 실재입니다. 이 두 차원이 서로 완전히 분리될 때 기묘한 모습이 되거나 가장 빈약한 형태의 사랑으로 전략합니다.

성경의 신앙은 인간이 사랑을 추구하는 과정에 개입하여 그 사랑을 정화하고 동시에 인간에게 새로운 차원을 열어 줍니다. 성경 신앙의 이 새로움은 두드러진 두 자리 , 곧 하느님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 안에서 주로 드러납니다. 먼저 성경의 세계는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제시합니다.

성경의 신앙이 발전하면서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기도의 내용이 점점 더 명확하고 분명해졌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기 6, 4) 하늘과 땅의 모든 창조주이시며 따라서 모든 것의 하느님이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만이 존재하십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유일하고 참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격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더욱이 그분의 사랑은 선택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온 인류를 치유하려는 목적에서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분명히 에로스라 할 수 있지만 또한 전적으로 아가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상숭배는 간음과 매춘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위대하여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인간이 되심으로써 죽기까지 인간을 따르시고 그리하여 정의와 사랑을 일치시킨 것입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꿈은 인간은 하느님과의 결합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합은 신성의 바다 속에 이름도 없이 가라앉는 침몰이거나 어떤 혼합이 아니라 사랑을 창조하는 일치인 것입니다. 그 일치 안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으로 인간은 인간으로 남아 있지만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바오로 성인이 말하듯이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 (1코린 6, 17)

두 번째 새로움은 인간의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협력자를 얻었습니다. 인간은 다소 불완전하며 본능적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 한다는 생각은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에로스는 어느정도 인간의 본성 자체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함께여야만 둘은 완전한 인간성을 드러내며 '한 몸'이 됩니다. 배타적이고 결정적인 사랑에 토대를 둔 혼인은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상이 되고 반대로 그 관계가 혼인의 표상도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은 인간 사랑의 척도가 됩니다.

예측할 수 없고 어떤 면에서는 전례가 없는 하느님의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몸소 '길 잃은 양' 고통받는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 나서실 때 극적인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분의 십자가상 죽음은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행위의 절정입니다. 그것은 가장 철저한 형태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찔린 옆구리를 바라볼 수 있을 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사랑에 대한 우리의 정의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살아가고 사랑하여야 할 길을 찾아 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행위에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우리는 단지 정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역동적인 행위 안으로 들어갑니다. 혼인에 대한 표상은 이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방식으로 실현됩니다.

전에 그 혼인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하였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봉헌에 동참하고 그분의 몸과 피를 나눔으로써 하느님과 결합하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 낮춤에 토대를 둔 성사의 신비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작용하며 인간의 모든 신비주의적인 고양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들어 높여줍니다.

성사의 친교, 곧 영성체를 통하여 나는 성체를 받아 모시는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주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영성체는 내가 그분을 지향하도록 하여 우리는 한 실존 안에 완전히 결합된 '한 몸'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제 참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아가페가 성찬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찬례에서 하느님 자신의 아가페가 몸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 "쪼개진 빵" - '사랑의 성사' 문헌에서 )

구체적인 신앙의 실천으로 건너가지 않는 성찬례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사랑은 먼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 성찬례로 그리스도와 일치하다 , 사랑의 일치 )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분명히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ㅡ (36) 다음에 계속 ㅡ

 

< 출처 :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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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내려 오지 않고 죽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다

십자가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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