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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65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5 조회수521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 공현 후 금요일(1/9)의 루카 복음과 동일한 복음입니다. 나병 환자에 관한 복음을 접할 때마다 소록도가 먼저 떠오르고 우리 가톨릭에 입교한 계기를 곰곰이 생각하면 소록도가 인연을 맺어 준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벗어나서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소록도였고 그곳에 가면 제가 축복받고 살고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했고 또 그곳 환우들을 생각하면 늘 애잔한 마음이 떠오르고 하여 제 교만함을 많이 반성하게 하였던 곳입니다. 소록도를 가는 길에 안성에서 신부님을 처음 만나뵙게 되었고 그날의 인연으로 신부님께서 저를 주님께로 인도해 주셨으니 그날 그 인연이 없었으면 지금도 주님은 제게는 멀리만 계셨을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2세 전 교황님께서는 한국천주교 전례 200주년을 기념하고 103위 성인의 시성식에 참석하시기 위해 1984년 5월 3일 내한하여 아픔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시고 예정에도 없었던 소록도를 방문하여 그곳 환우들에게 일일이 축복을 내려주신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당시 무척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낮은 곳을 찾아가신 교황님의 발걸음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온 인류에게 큰 감동을 주셨습니다.

 이런 발걸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성탄 전야미사를 우리 교회 장상께서 소록도에서 미사를 집전하면 우리 사회에 엄청난 감동을 줄 것이며 저희들이 백번 천 번 복음을 전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올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려면 우리도 가장 낮은 곳에서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꿈같은 생각도 해봅니다.

오늘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신 것은 언제나 가장 비천한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라는 가르침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나병을 한센 병으로 불리고 있지만 아직도 완전 치유를 하지 못하는 불치병이므로 일부에서는 이를 天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당연히 天刑으로 생각하였을 것이고 그런 天刑을 사면시켜 주셨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민중들은 天刑을 사면시켜 주셨으니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생각하였거나 아니면 우리에게는 天刑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한센 병은 우리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병입니다. 우리 몸도 죽으면 모두 썩어 문드러지고 우리 스스로가 자연을 훼손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등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가 사는 세상도 문둥병이 걸려서 언젠가는 종말이 온다는 생각을 하면 문둥병이 상징하는 의미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본래부터 있었던 것은 영원한 것이지만 창조된 것은 반드시 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은 잠시 머물다가() 점점 파괴되는 과정을 거쳐() 모두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생성소멸의 이치를 불가에서는 생주괴멸(生住壞滅)이라 하며 이를 우리 인간에게 적용하게 되면 生老病死가 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파괴(壞)되고 병(病)들어 신음하는 상태보다는 현상을 유지하는 상태(住, 老)에서 더 오랫동안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당시 사회는 이미 문둥병에 걸려서() 멸망하기 직전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이런 생성소멸의 과정을 우리 인간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는 종교가 생겨난 여러 요소중 하나이므로 거의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이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육신의 부활로, 요즘은 이를 신앙고백이 아니고 실제로 믿는 사람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불가에서는 윤회를 하는 것으로 해결하였으나  육신이 부활하고 윤회하여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모두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은 현세의 삶을 심판받아 천당 또는 지옥에서 살게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불교에도 천당과 지옥이 있는 것은 마테오 리치의 '天主實義'에 의하면 '천주교는 오래된 종교이므로 釋氏가 우리 敎의 이론을 훔쳐 들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므로 당시는 우리 천주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닌 유대교로 착각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복잡한 것은 전혀 알려주지 않으시고 오직 자비의 실천만을 알려주시며 이를 몸소 실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리는 너무 복잡하여 아둔한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교리를 전부 이해하고 그 많은 것을 배우다가는 망건 쓰다가 장 파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병들고 사회가 썩어 가는 것은 자비의 실천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일관되게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도 자비요, 둘도 자비요, 셋도 자비입니다. 이제는 다른 것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직은 제게 시련을 주지 않고 계시므로 늘 축복에 감사하며 감사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자비의 실천이 전부로 생각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께 모여 들었을까요? 복음을 듣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모여 들었을까요? 복음을 듣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모여 들었다면 애초부터 예수님은 그들을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뒷전이고 딴 생각을 하고 모여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외딴곳에서 계셨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하느님께 감사하며 자비를 실천하고 또 시련을 극복하려고 모인 교우들이지만 일부 교회에서는 예수님께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예수님을 바깥 외딴곳에 머물게 했던 그런 자들을 불러 모와서 예수님은 우리가 부탁한 청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준다고 하고 있으므로 우리까지 억울하게 매도당하지 않기를 기도하며, 혹시 지금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모두 들어 줄 수 없으므로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곳에서 홀로 외롭게 계시지는 않으실까?...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 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저희들과 사회가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평화스러운 초원에서 더 오래도록 함께 사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저희들이 평화스럽게 사는 길은 하나도 자비요 둘도 자비요 셋도 자비이므로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 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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