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6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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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순 | 작성일2009-01-16 | 조회수583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오늘의 묵상입니다.[연중 제1주간 금요일]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사람의 아들'과 죄에 관한 언급이 있으므로 이에 관한 신학논쟁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신학논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논쟁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논쟁으로 인성만을 주장하는 아리우스(250?~336?)와 신성을 주장했던 아타나시우스(295~373)의 논쟁입니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는 45년의 차이가 나므로 직접 논쟁한 것은 아니며,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이들을 배척하였고 이 논쟁은 우리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지우고 싶은 피로 얼룩진 논쟁이었으며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는 최초의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325)를 소집하여 신성만을 인정하기로 결정하였지만 이 논쟁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사실상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은 당연히 예수님의 신성을 주장하고 非 그리스도교인은 신성을 부인하고 있으므로 非 그리스도교인과 지금도 흔히 하는 논쟁입니다. 그 후 인성과 신성의 결합이라는 양성론으로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확정하여 어느 때는 인성으로, 어느 때는 신성으로 이해해야 하므로 복음을 묵상할 때에는 이 부분을 어떻게 조화를 이뤄가며 묵상을 해야 할 것인지, 사실 이 부분이 묵상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직접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하셨으므로 인성의 입장에서 묵상을 하는 것이 오늘 복음의 의미를 바르게 묵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영어 성경에서는 'Son of man'입니다. 이를 예전에는 人子로 번역하였고 '사람의 아들'로 번역하면 큰 불경을 저지른 것으로 오해하여 개신교 일부 교단에서는 '사람의 아들'로 강의한 교수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사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율법 학자들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성경을 문자로 해석하는 데는 모두 박식한 사람들이지만 성경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있으므로 이제는 그런 잘못에서 벗어나라는 뜻으로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질문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이를 더 줄이면 A가 쉬우냐? B가 쉬우냐? 하고 물어 보신 것입니다. 아마 이 질문에 율법 학자들은 'A가 더 쉽다, 아니면 B가 더 쉽다'하며 의견이 분분하였을 것 같습니다. 단순하게 이 물음만을 생각하면 누구나 어느 것이 더 쉬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이런 단답형을 물어보신 것이 아닙니다. 당시는 병에 걸린 것은 죄 때문으로 생각하였으므로 지금 성전에서 하는 일들은 '죄를 용서해 준다'며 예물을 받고 있는데 중풍 병자가 예물을 바치고 난 다음에는 죄를 용서받고 걸을 수 있느냐? 이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예물을 바치고 죄를 용서받았으면 당연히 걸을 수 있어야 하는데 걸을 수 없는 것은 성전에서는 예물만 챙기고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걸을 수 있게 치료를 해 줬으므로 죄는 당연히 용서받았으므로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여 뭐가 잘못되었냐고 그들에게 반문하고 계십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죄를 용서해 주고 있으므로 율법 학자들은 기가 막힐 일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였습니다. 그럼 그 사람의 죄는 무엇일까요? 오늘 예수님은 인성으로 말씀하고 계시므로 원죄를 예수님이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는 원죄는 물론 다른 죄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어느 누구도 죄인이 태어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느님께 불충한 잘못을 늘 범하고 있지만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중풍에 걸린 것은 원죄 탓도 아니며 다른 죄를 지어서 중풍에 걸린 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원죄에 관한 논쟁은 원죄를 부인하고 인간의 자율의지를 강조한 펠라기우스에 의해 5세기초에 제기되었으나 이를 반박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원죄는 무지한 민중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그 당시 민중의 수준에 맞는 가르침이며, 우리 신앙에서는 아직도 이를 교리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원죄 교리가 추구하는 의미를 합목적성에 적합하도록 이해해야 할 것이며 이를 그대로 믿는 것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연좌제를 지금도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육신의 부활을 그대로 믿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율법 학자를 빗대어 지금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지금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면 말씀을 묵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입교후에 제일 당황한 것은 많은 교우들이 성경을 특히 복음서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궁금하여 가장 보수적인 교단의 어느 목사님에게 물어봤습니다. 그 목사님의 대답은 성경을 양심에 입각하여 가르처 주면 교단에서 쫒겨날 수밖에 없음으로 그점을 염두에 두고 본인 스스로가 이성적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양심적인 목사님은 결국 교단에서 쫒겨났지만 그분을 만난 것은 제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우리는 원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不忠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저희에게 충서(忠恕)와 자비만을 알려 주셨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섬기면 종국에는 탐욕스러운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므로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고(忠) 우리들은 서로 용서하고(恕)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것처럼 자비를 실천해야 우리 인류가 영원히 구원받을 수 있는 길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인간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늘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왕이 차지하고, 독재자가 차지하고, 조직의 장이 차지하고 윗사람이 차지하고 있으므로 모두가 하느님의 자리를 탐내고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특별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섬기는 것이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므로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뜻에만 순종하여야 합니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한 것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여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며 늘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구원받는 길은 오직 충서(忠誓)와 자비를 실천하는 길이 유일한 길이고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함께 묵상하였습니다. 대자대비 하신 아빠 하느님 * 내일 묵상은 새벽미사에 참례하므로 강론 말씀으로 대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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