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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식일 정신도 사랑으로 승화해야 한다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20 조회수556 추천수4 반대(0) 신고
 
 

안식일 정신도 사랑으로 승화해야 한다 - 윤경재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르 2,23-28)

 

<그리움을 훔쳤다> - 공광규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경찰서까지 끌려갔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 나올 때

시멘트 담벼락에 매달린 시래기를 한 움큼 빼어

냄새를 맡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중략-

식당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 몫 보려는 주인은 그 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만큼이나 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하고 썩어빠진 도심의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누구와 주먹다짐 한번 안 해본

산골 출신인 그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도시의 인심에게 주먹을 날렸다.

경찰서에 넘겨져 조서를 받던 그는

추운 유치장 바닥에서 도심의 피곤을 쉬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공광규 시인이 지은 <그리움을 훔쳤다>를 읽으면서 오늘 복음을 묵상합니다. 뛰어난 상상력으로 고향의 인심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시멘트 담벼락에 꽉 막힌 도시의 각박함과 대조하여 썼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오늘 복음 내용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한가닥 미소가 피어 오르게 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보듯 이스라엘 사람들 농사법은 파종 시기가 되면 먼저 씨를 아무데나 뿌립니다. 나중에 길이 될지, 바위 위에 뿌리게 될지, 가시덤불에 뿌릴지 농부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비가오고 씨앗이 좋은 땅에 뿌리를 내리면 그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전도여행을 다니시다가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엔 흔히 보는 광경이었을 겁니다. 미리 나있지 않은 길을 새로 내는 예수님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무성한 밀 사이를 헤치며 길을 내었습니다. 부딪칠 때마다 까실하게 전해져 오는 밀대의 감촉이 좋아 일행은 양팔을 벌리며 마치 춤을 추듯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결에 춤추는 밀대를 바라보시며 추수할 시기가 다가왔다고 마음으로 흡족하게 여기시면서 걸어가셨습니다. 아마 콧노래도 흥얼거리셨는지도 모릅니다. 그 뒤를 따르며 길을 내던 제자들도 오랜만에 고향 생각에 파묻혀 저도 모르게 밀 냄새를 맡고 싶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밀 한줌을 꺾어다가 코에 대고 고향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나는 듯한 비릿한 내음을 온몸으로 만끽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시작하자 전염된 양 제자들 모두 밀대에 손을 대었습니다. 율법이니 뭐니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흥겨워하며 밀대를 자르는 모습을 보던 바리사이들은 그만 기가 질려버렸습니다. 한 떼거리가 밀밭에 들어가 길을 내는 것도 그런데, 때 이른 추수까지 하니 말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는데 율법에 어긋나는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가 잘못을 일깨워 주어야할 스승이라는 자까지 함께 나서서 그러니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내며 한마디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렇지 않아도 마뜩하지 않은데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이렇게까지 마음이 닫혀있는 그들을 보니 측은해졌습니다. 안식일 정신은 사람들을 억제하고 올가미에 씌우고자 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만큼은 쉬면서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람들을 돌보아 주셨는지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으라는 뜻입니다. 먹고 살고자 힘들고 바쁘게 지내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라는 의미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에서 떠나는 자유’를 맛보라는 안식일을 ‘~에 억압당하는 규정’으로 확대해서 만든 것은 어쩌면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을 손쉽게 다스리고 한 몫 보려는 심보에서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번도 어떤 규정을 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스스로 율법에 얽매여 돌아가셨습니다. 율법에 자유로우신 분이었지만, 스스로 자유를 억제하신 것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자유를 쟁취하고자 혁명을 일으킨 세력은 언제나 새로운 율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 율법 탓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가장 분명한 예입니다. 혁명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인간의 속성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깨달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인간의 취약한 점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코린토 전서 8장에서 고기를 먹는 문제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마음대로 쓰는 것보다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배우도록 권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는 단순히 “~로부터의 자유”에 머물러서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만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반드시 “~를 위한 사랑”으로 승화해야 그 정신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 가시면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사랑으로 승화시킨 그리스도의 본보기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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