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후두암 환자가 수술 후에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진찰실로 들어섰다. 60대 중반의 남성환자는 힘없는 표정으로 낙심에 차 있었다. 수술로 암은 제거했지만 목소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함께 온 딸이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아버지가 교회 장로이신데 평소에는 찬양하고 기도를 인도하고 봉사도 열심이던 분이 수술하고 말을 못하게 되자 이제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고 집에만 계세요.” 환자의 오그라든 마음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는 다른 환자들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이 환자에게 말문을 열었다. “목소리가 없어져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기뻐해야할 것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진찰실 밖에 있는 많은 암환자를 생각해 본다면 저분들의 절반 이상은 말기 암으로 사망하게 될 운명에 있는 분들입니다. 아마 돈으로 생명을 산다면 집을 팔아서라도 사려 할 것이고, 1년 아니 6개월이라도 연장할 수 있으면 또 얼마라도 내겠다고 할 만큼 절박한 분들도 있습니다.
암이 뼈로 번져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거나 뇌와 척추로 번져 마비증세로 걷지도 못하고 누워만 계신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환자분은 목소리가 없어졌지만 우선 생명을 건졌고 눈으로 볼 수 있고 걸어 다니며, 가고 싶은 곳에 가거나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습니다. 5퍼센트만 부족할 뿐이지 95퍼센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암에 걸렸다고, 말을 못한다고 집에만 계시지 마세요. 나가서 세상 사람들에게 나 아직 안 죽었다. 목소리는 없어졌지만 그 무서운 암을 이기고 이렇게 살아있다, 그리고 또 다른 암환자들에게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세요.”
다행히 환자는 6주간 치료가 끝날 무렵에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교회를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후두로 소리를 내지 못해도 대신 식도를 이용하여 소리를 낼 수도 있고 인공성대장치를 목에 대면 로봇이 내는 듯한 소리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식도발성을 한 환자의 말을 내가 알아들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암환자한테서 암만 치료하는 것은 반쪽짜리 의사다.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의 질까지 회복시켜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진료대기가 많은 상황에서도 마음이 오그라든 환자를 만나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렇게 하고자 노력한다.
이창걸(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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