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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너의 인생에 대해 분노(忿怒)하라. (로마4,9-1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16 조회수921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10. 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도란도란글방

 

너의 인생에 대해 분노(忿怒)하라.

 

(로마4,9-16)

9 이러한 행복은 할례를 받은 사람만이 누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누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앞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고 하였습니다. 10 언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입니까? 받기 전입니까? 할례를 받은 후가 아니라 받기 전의 일입니다. 11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것을 확인하는 표로 그는 할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음으로써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2 또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사람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할례받은 사람이란 그저 할례를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보여 준 믿음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물려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14 만일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상속자가 될 수 있다면 믿음은 무의미하게 되고 그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15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마련입니다. 16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곧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에게 그 약속을 보장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공산주의 선언문을 시작으로 하여, 1억 명이 살해(殺害)를 당했습니다. 1억 명이! 유토피아란 말 자체가, ‘없는 것이라는 뜻이에요. 이 세상에는 없는 것. 그래서 인간이 소망(所望)하는, 그리고 그들이 그려내고 있는 유토피아는 절대 인간들이 이 땅에서 만들어 낼 수 없어요. 그들의 시도는, 오히려 이런 추악(醜惡)한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상적(理想的) 사회를 만들어서 잘 살아보겠다. 모든 이들이 평등한, 누구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 이게 뭐였어요? 에덴동산의 아담의 선악과 먹는 사건이, 이거였잖아요? 인간의 뜻이나 기호가 전혀 고려되지 않고, 하느님 마음대로 만들어 내신 그런 나라는 식상하다는 거예요. 구차하게 하느님께만 의지(依支)하여 살지 않고, 스스로의 힘과 노력을 동원해서, 우리의 기호에 맞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서, 거기에서 자신이 왕이 되어 살고 싶은 게, 아담의 욕망(慾望)이었잖아요?

 

그런데 아담이 잊은 게 있어요. 하느님과 관계없는 아담은, 흙에 불과하다는 걸 잊었어요. 아담이란 이름 자체가, ‘이라는 뜻이에요. 그 단어는 더스트, dust’거든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아다마, 이라는 개념(槪念), ‘없음이었어요. 하느님은 인간을 만들어 놓고, 그 이름을 없음이라고 지었다니까요. ? 인간이란 존재는 하느님 앞에서 없음으로 존재해야, 비로소 있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흙이 만들어내는, 다른 말로, ‘없음이 만들어내는 세상! 그 세상나라는, 결국 없음으로 끝나버릴 것을 그가 몰랐던 거예요.

하느님은 이 역사와 인생들에게, 세상 속 아담무리들에게, 바로 그 없음들이 만들어내는 역사(歷史)라는 작품을 감상시키고 있는 거예요. 성도는 그걸 보고 가는 거예요. 열심히 구축(構築)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있음의 가치가 있는 게 있는지 잘 보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추구하는 행복, 쾌락(快樂), 화려함, 아름다움, 그 어느 것 하나 진짜, ‘있음의 가치가 있는가 보라는 거죠.

 

우리는 그런 걸 다 쟁취해내는데도, 이렇게 불행하고 공허(空虛)한 거예요. 하느님은 보라는 거예요. 진짜, 인생이, 흙이 만들어 내는 것 중에, 진짜 아름다움이, 가치가, 행복이, 쾌락이 있는가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그런 거 다 소유(所有)한 것 같은 자들이, 자살을 하는,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것이죠.

그게 인간들을 절대 행복하게 못 만들더라는 것을 보여 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이 하느님의 복()을 구하고, 스스로 노력하여 만들어내겠다고 구축한, 그 유사품(類似品)! ‘생산라인! 원래 인간은 처음 만들어지자마자, 복을 받았단 말이에요.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들자마자 부터 부었잖아요? 복은 여러분이 뭘 해서 얻어내는 게 아니라, 이미 받고 내려오는 거예요.

 

복을 받고, 그 복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이, ‘잠깐만요, 스톱(stop)! 내가 한 번 스스로의 힘을 동원하여 복을 한 번 만들어 볼게요. 행복을 한 번 추구해 볼게요.’ 이게 선악과 사건이잖아요? 하느님처럼 되겠다.

그러니까 이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복을 막고, 우리가 복을 한 번 만들어 보겠다는, 이 복이 뭐예요? 이게 모조품! 유사품 복이라는 거예요. 이것이요! 그 유사품 복의 생산라인이 뭐냐 하면? 선행체계(善行體系), 종교라든지 도덕이라든지, 윤리 같은 선행체계와 교육이라든지, 이념 같은 지식체계(知識體系)란 말이에요. 요게 인간들의 유사품 복을 만드는 생산라인이에요.

그러한 선행체계와 지식체계의 결과물이,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결과물로 드러나고 있다는 걸 성도는 알아먹어야 돼요. ‘아닌데요. 많이 발전했는데요.’ 진짜 발전했는지 보세요.

 

아담 안에 인간들은, 그 누구도, 자신의 밥그릇을 손해(損害) 보면서까지 관용을 지속할 수 없어요. 내가 타자(他者)보다 더 고생하고 수고하고 있다는 섭섭함이 밀려들어오게 되면, 관용이고 유토피아고 다 날아갑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자존심을 추켜 세워주는 선동(煽動)의 연설 앞에서, 환호를 해요.

모든 이들이 다 평등하게 사는 그런 세상을 만들자!’ ? 인간은 소중하니까! 인간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이런 선동에, 모든 이들이 환호하게 되어 있어요. 하느님처럼 되었거든요. 모든 존재가! 너희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세상을 너희들의 힘으로, 분노와 비판(批判)과 행동으로, 성취해내라! 쟁취해내라!

 

진짜 복은, 분노하고, 분투(奮鬪)하고, 투쟁(鬪爭)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열심을 부려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착하게 살아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거저 받는 거예요. 그게 일한 것이 없이 하느님께 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 로마서 46절 이 바로 그 말이에요.

일한 것이 없이 하느님께 거저 받은 복! 그게 복이에요. 헬라어의 행복이란 단어, ‘마키리모스라는 그 단어 자체가, ‘위에서 아래로 흐름이라는 뜻이에요.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래서 행복하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온 것이어야 되지, 수평적으로 달리면서, 쟁취해 낸 것은 행복이 될 수 없어요. 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창조주(創造主)에게서 흘러내려오는 복을 거부(拒否)한 아담들은, 스스로 그 복을 생산해내기 위해서, 선행체계와 지식체계 등을 만들어내면서, 이 수평의 역사를 달리면서, 고군부투하고 있는 거예요. ? 내가 만들어내야 돼요. 이제는 그 복을! 행복을 내가 만들어내야 돼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복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 와야 진짜 복이에요. 그걸 생명(生命)’이라 그래요. ‘바라크!’ 그 수평에서 생산된 복은, 다 위조품(僞造品)이며, 모조품(模造品)이에요. 여러분을 그게 가끔 반짝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자식, , 남편, 가정, 인기, 명예! 잠깐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지만, 그게 여러분을 영원히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어요. 그게 위조품이에요. 모조품이란 말입니다. 그걸 모형이라 그래요. 모형!

르네상스라는 방법을 통해서, 문예부흥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그게 선행체계잖아요? 지식체계잖아요? 사람들을 잘 가르쳐서 도덕적인 사람을 만들고, 좀 더 지식을 많이 쌓게 해서, 평화로운, 좋은 세상을 만들자가, 르네상스 아닙니까? 이 문예부흥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복된 세상을 구축(構築)해보려 했던 인간은, 세계 1, 2차 대전으로, 선행체계와 지식체계의 무용함을 체험해야 했어요.

무식해서, 그리고 도덕과 윤리를 안 가르쳐서,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 줄 알았더니, 잘 가르쳤더니, 수천만 명을 죽이는 거예요. 서로! ‘아니네!’ 하고 증명(證明)해 낸 거예요. 하느님이 역사를 통하여!

뿐만 아니죠 물질문명을 개발(開發)하고, 계발(啓發)하여, 삶의 자원을 확보(確保)하고, 과학적 진보(進步)를 통하여, 삶의 질을 향상(向上)시키려는, 보다 나은 환경을 만들려는, 그런 노력이, 오히려 환경을, 자연을 파괴해 버렸어요. 행복한 세상을 구축해 보겠다는 인간들의 노력이, 오히려 세상을 파괴하고 있단 말이에요.

 

지구가 지금까지 인간을 보듬어 안고, 생물의 존재 터전이 될 수 있었던 건, 대기 중에 산소 21%, 이산화탄소 0.03%가 그대로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에요. 신기하죠? 여기에 영점 영 몇 %만 올라가도 지구는 멸망(滅亡)해요. 생물이 못 사는 곳이 됩니다. 그런데 산소 21%, 이산화탄소 0.03%가 수천 년 동안 그대로 그 비율을 유지하면서 왔어요. 하느님은 살아계신 거요. 이산화탄소가 0.03%보다 적으면, 지구는 사람이, 존재가 살 수 있을 만큼 따뜻해지지 않아요.

산소는, 생명체의 본질인 대사와 자기복제(自己複製)를 가능하게 하는 거요. 딱 그 만큼만 있어야 되요. 너무 많으면 폭파! 불타요. 산소용접기가 되는 겁니다. 심지어 산소는 오존층을 포함하거든요. O3가 오존이니까. 산소가 우주공간에 흐르는 방사능 물질을 막아주고 제어해 줘요. 산소가! 우주공간에 흐르는 방사능물질은 핵폭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산소가 오존층이 막아 주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 복을 생산하겠다는 인간들의 열망(熱望)과 시도(試圖),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비율을 급격하게 증가시키고 있어요. 그로 말미암아 산소를 배출(排出)해야 하는 식물들이, 나무 스스로의 자존을 위해서, 왜냐하면?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으니까, 나무들이 살아야 되거든요. 그래서 산소를, 나무 안에 저장(貯藏)하기 시작했어요. 변태(變態)들이, 별종(別種)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는 나무가 광합성을 해서 산소를 내줘야, 우리가 사는데, 이산화탄소를 내주고 있어요. 아마존 밀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구의 기온이 점점 올라가고 있는 거예요. 이산화탄소가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비율(比率)0.06%가 넘는 순간, 지구에서는 그 어떤 생명체도 살 수가 없어요.

그러한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오존층을 파괴(破壞)해서, 우주의 방사능 물질로부터 지구를 지킬 수 없는 상태로, 오존을 찢어내고 있고, 산호초 막을 부식시켜서, 산호초를 질식시켜 폐사(弊死)시켜버려요. 지금 지구 곳곳의 산호초 군락(群落), 멸종상태에 이르렀대요. ‘, 몰디브나 괌이나, 사이판에 가면 있던데.’ 그 사람들은 관광지에서, 사람들을 스노클링시키려고 보존(保存)해 놓은 거예요. 산호초 군락이 거의 멸종상태(滅種狀態)예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산호초가 폐사(弊死)하면, 쓰나미나 해일(海溢)이 왔을 때, 방어막이 없어서 대재앙(大災殃)이 됩니다. 인도네시아나 일본의 쓰나미가, 그렇게 대재앙이 된 건, 산호초 보호막이 없어져서 그런 거예요. 꿀벌들이 죽어가고 있고, 박쥐와 북극곰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꿀벌이 사라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죠? ? 박쥐와 북극곰은 우리와 별 관계가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러나 꿀벌은 꿀도 주고, 세상의 식물의 충매화니까, 꿀벌이 화분, 꽃가루를 이동시켜 주니까. 얘네들 죽으면 안 된다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거죠. 실제로 이 충매화는 꿀벌이 없으면, 우리에게 산소도 못 주고, 우리에게 식량을 제공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것들이 다 죽어가고 있다니까요.

 

지구의 온도가 높아갈수록, 해충(害蟲)이 안 죽겠죠? 파리, 모기, 진드기 같은 거. 온도가 높아지면, 해충이 안 죽고, 그 해충은 농업에 치명(致命)적인 영향을 미쳐요. 벌써 그래요. 미국의 농업 총생산량이, 4,000만 톤이 줄어들었습니다. 일부러 생산하지 않은 게 아니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닌데, 이렇게 그냥 줄었어요. 그럼 우리는 거기에서 징조(徵兆)를 봐야 된다 말입니다.

우리가 거기에서 위기의식을 못 느끼고 있을 뿐이에요. 이미 일은 벌어지고 있단 말입니다. 바다가 산성화(酸性化) 되고 있고, 이대로 가다간, 바다생물의 멸종? 시간문제인 거예요.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은 점점 높아지고, 그 해수면이 높아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빙하 밑에, 메탄이 들어 있단 말예요.

빙하가 계속 녹아서 이게 터지면, 그래서 산성비가 한 번 내리면, 지상 생물은 멸종이에요. 그런데 녹아내리고 있다니까요. 그래서 곰들이 죽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생태학자(生態學者)들은, 현금(現今)의 인류를,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는 주전자 안에 들어 있는 개구리(The Frog in the Pot)이라고 얘기하죠.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는 지구에 살고 있는데, 거기에서 아이고 뜻뜻해!’하며 사우나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괜찮아,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이쯤 되면 눈썰미 있는 성도는, 적어도 성도라면, 인류 역사의 필연(必然)적 종국을 바라볼 수 있어야 돼요. 인간들이 모조품 행복을 생산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뛴 결과는, 멸망(滅亡)이요, 사망이구나를 볼 수 있어야 돼요. 거기에 분노하여, 그걸 고치고 자연을 보호하고, 자연 환경을 원래대로 보존(保存)하고. 이게, 교회가 할 일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 거 아녜요. 하세요.

 

그런데 그게 교회의 본무(本務)가 아니라, ‘분노하라, 일어나라, 투쟁하라이게 교회의 본무가 아니라, ‘아 인간들, 흙들이, 아담들이 만들어내는 역사는, 이렇게 밖에 결과물을, 열매를 못 만들어내는 구나를 보고, 하느님이 만든 하느님나라를 붙들어야 되는 게 성도란 말입니다.

분노하여 사회를, 세상을 개혁(改革)하여,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사람들을 교육하고, 도덕과 윤리를 가르쳐서, 훌륭한 인격을 가진 자로 만들어 내는 게 성도의 본무! 교회의 본무가 아니라, 아담들은, 하느님이 그 생명력을 부어주지 않으면, 이렇게 멸망 받을 밖에 못 만들어내는 인간들이구나. 이거 배우고, 예수의 십자가, 보혈을 붙드는 거예요. 십자가 붙드는 게 교회(敎會)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이 교만(驕慢)한 인류가 대자연을 향한 사랑, 운운하면서, 또 다른 종류의 모조품 생산라인을 가동시키고 있는 거예요. 분노하라는 거예요. 대자연 사랑을, 보편적(普遍的) 가치로 합의(合意)해서, 이 지구를 살려내자는 거죠. 프레온 가스 쓰지 말자. 스프레이 쓰지 말자. 냉장고에 들어 있는 거는 어떻게 할 거요? 그럼 냉장고도 쓰지 말아야지. 교회가 그런 거 하는 덴가요? 이런 운동하는 곳이 교회입니까?

동성애법 이거 통과대면 안 돼! 매일 전화 와요 요사이. 교회에서 그거 사인해서 돌리라고. ‘교회가 이런 걸 해야죠.’ ‘너는 순리로 쓸 거 역리로 안 쓰냐?’ 물어보고 싶어요. , 네가 도대체 뭔데, 동성애자, 동성애자, 하라는 게 아니라! 그래, 너는 순리로 쓸 거 역리로 쓰는 게 없어? 다 그렇게 쓰고 있잖아? 그런데 네가 뭔데, 그 사람들을 그렇게 함부로 마귀 취급을 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런 걸 허락(許諾)하시는 건, 보여 주시는 건, 우리가 다 창녀(娼女), 우리가 다 그렇게 순리(順理)로 쓸 걸, 역리(逆理)로 쓰는 자들이요, 우리가 다 도둑놈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런 걸 갖다, 우리 주변에 놔두시는 건데. ‘나는 너랑 달라!’ 요걸 증명하는데 그걸 쓴다니까요. 우리가!

아니 제 몸 위해서, 제 몸 팔아 일하는 게, 창녀(娼女)? 여러분은 안 그렇게 사세요? 여러분의 유익(有益)을 위해 여러분 몸 파는 게, 일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창녀 짓이지 뭐예요? 무슨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을 해요, 우리가? 다 우리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게, 창녀 짓이지 뭐예요?

그런데 우리가 창녀에게 넌 왜 더러워라고 할 수 있냐고요? ‘넌 왜 남자 100명하고 잤어? 난 한 사람 밖에 몰라!’ 그래 그럼 넌 깨끗하다는 거야? ‘의인(義人)은 없다 하나도 없다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걸 갖고, 그렇게 나타난 걸 갖고 사람들을 판단(判斷)한다 말이에요.

 

미국인 한 사람의 음식 소비량(消費量), 케냐 사람 한 사람의 음식 소비량이 오백 배 차이가 난대요. 얼마 전까지 50배였거든요. 그런데 얼마나 미국 사람들이 쳐먹는 지, 500배가 됐어요. 별로 안 먹는 것 같죠, 우리 ? 그런데 그만큼 우리가 모르는 거예요.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케냐 사람 500인 분의 음식을 먹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고? 좀 덜 먹고, 덜 싸서, 덜 먹은 걸로 나누고, 덜 싸서 오염(汚染)을 방지(防止)하자! 이게 교회가 해야 할 일이냐고요?

너는 오백 배 먹고도, 아무런 가책 없이 이렇게 사는 인간이니까, 예수 의지해라!’가 교회의 할 일이지, 덜 먹으라고 한다고 여러분이 덜 먹느냐고요?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고, 어떤 박사가 이야기 하면, 덜 먹을까. 그건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오백 배 더 먹는 우리가, 오백 배 덜 먹는 케냐 사람보다, 행복지수(幸福指數)가 낮아요. 그럼 뭐가 행복이냐고요? 미국이 150위예요. 케냐는 100위 안에 있어요. 그럼 덜 먹어서 불행(不幸)해지자는 겁니까?

인간의 선행체계(善行體系)도 마찬가지예요. 교육과 종교, 도덕, 윤리, 이것이 진짜 인간들을 착하게 만들어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옛날에 자랄 때는, 초등학교 들어갈 때, 가나다라 알고 오는 애가 몇 명 없었어요. 요즘 영어까지 다 마스트하고 들어온대요. 유치원 때! 이런 교육열! 종교기관? 예전에는 교회가 몇 개 밖에 없었어요.

한국에 가보세요. 공동묘지(共同墓地) 같아! 밤에 이 빨간 네온 십자가가, 얼마나 많은지 하늘에서 보면, 이게 공동묘지 같아. 그렇게 종교기관도 많아지고,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는다 그래요.

그러면 선행체계와 지식체계, 종교와 이념과 교육이, 지금 옛날에 우리가 자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엄청난 물량(物量)으로 쏟아지고 있단 말이에요. 그게 사람을 착하게, 성숙(成熟)하게 만들어 냈느냐고요? 지금 그렇게 만들어서, 좋은 세상 만들자고, 그거 하는 거잖아요? 우리 자랄 때, 어린아이들과, 지금 애들을 비교(比較)해 보시라고요.

난 지금 애들이 실세(實勢)가 되어서 만드는, 그 세상 내가 살아야 된다는 게, 너무 소름끼쳐요. 여러분 맨날 애들보고 그러죠. ‘왜 이리 버릇이 없어! 싸가지가 없어! 부모가 뭘 가르친 거야!’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가고 있잖아요? 교육이 무슨 사람을 올바르게 만들어냈냐고요? 종교가 무슨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어냈냐고요? 실패(失敗)하고 있는 거예요. 흙들이 만드는 역사가 실패하고 있는 중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좋아요. 다 좋은 이야기예요. 노력(努力)해보자고요. 열심히 해보자니까요. 인류가 합심해서, 지구도 살리고, 모든 이들이 행복해 질 수 있는 유토피아 건설을 해보자 말입니다. 그리고 콜드 이블(cold evil) 같은 거 올바로 인식해서,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그런 지상 천국, 꿈꾸어보자고요. 열심히 하세요. 그리고 실패(失敗)하세요. 아니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열심히 해야, 그 실패가 진짜 실패로 나에게 와 닿아요. 열심히 하세요.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인간들의 사정을 지금보다 더 낫게 만들어 줄 거라고 착각(錯覺)하지 마세요. 이 세상은 점점 불행한 상태로 밀려가고 있어요. 어차피 첫 창조(創造)의 세상은, 멸망(滅亡)되기 위해 창조가 된 거예요. ‘불사르기 위해 간수(看守)가 되었다.’ 그러잖아요? 그 자체가 죽은 것임을 증명해야하는, 그 역할을 부여 받은 게, ‘, 이거 죽은 거구나!’ 이거 증명해야 할 역할을 부여받은 게, 첫 창조요, 첫 창조 아래의 모든 만물(萬物)이에요.

그들이 역사 속에서 뭘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이건 죽은 거네. 아담은 그냥 흙이 맞는 거네. 흙이 만들어낸 건 흙이네!’ 이걸 증명하는 게 역사와 인생이에요. 그런데 자꾸 이 흙들이, 무언가 있음의 흉내를 내는 거기에, 분노를 해야지, 당연하게 진행되어 가는 그것에 분노를 하면, 이게 기고만장(氣高萬丈)이라는 거예요.

누가 일부러 멸망을 시키려고 하지 않아도, 불살라버리려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죽음의 자리로 귀결(歸結)될 수밖에 없는 첫 창조의 그 세계의 실체를, 성도는 보고, ? 성령이 들어와서 의(), (), 심판(審判)에 대해서 알려 준다고 했으니까, 성도는 그걸 보고, 하느님나라, 하느님의 ()’를 붙들고 가는 거요. 그걸 그리스도교라고 그래요.

 

누차 말씀드리지만, ‘만물(萬物)은 예수로 말미암고, 예수로 비롯되어, 예수에게로 돌아간다.’ 그래요. 다른 곳에서는, ‘만물은 예수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그러죠. 그렇다면 역사와 만물의 존재 목적은, 예수가 누구이며, 왜 예수의 은혜에 의해서만, 존재(存在)해야 하는 지를, 증명하는 게 이 존재들의 역할(役割)이에요.

그래서 하느님은 성도라는 무리를 택하셔서, 그들에게만, 이 만물과 역사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는, 이 죽음의 세상으로 내려 보내시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애굽의 종으로 보내시는 것처럼, 당신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 마귀의 종으로 보내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여기에서 마귀의 행사(行事)가 어떤 것인 지를 보게 하고, 거기서 끄집어내는 걸, 구원이라 그런다고요. 그래서 여러분은 구원을 알면 알수록 변태가 되고, 별종이 돼요. 온통 세상이 합의하여 가는 그 길에서 꺼내는 게 구원이기 때문에, 그래서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이, 하느님의 은혜(恩惠)가 가입하지 않았을 때, 그들이 어떤 지경(地境)으로 사망(死亡)’이 되는지, 자기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선택 밖의 존재들의 행보(行步)와 그들의 열매와 결과물을 보면서, 배우라는 거예요. 흙이 만들어내는 인간상과, 인간 세상!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키고, 성숙하게 되어서, 누구나 다 평안을 누리는 그런 세상을 만들자는 게, 인간들이 만들어낸 인간상이잖아요? 이것과 그런 걸 통하여 만들어내는 보편적 인간들이 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理想鄕)! 이런 게, 왜 흙으로 끝나게 되며, 이게 무가치(無價値)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배우고 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이 세상이 살맛이 나면 안 돼요. ‘예수 믿으면 늘 행복하고, 늘 기쁘라고 그러지 않았나요?’ 진짜 그러세요? 정신병원 좋은데 소개(紹介)해 드릴 테니까 가보세요. ‘항상 기뻐하라는 건, 나와, 나와의 관계(關契)를 맺고 있는 대상이 가변적(可變的)일 때, 항상 기뻐할 수 없듯이, 너는 항상 변하지 않은 예수와만 관계해야 된다가, ‘항상 기뻐하라란 말이에요. 그 예수만 나를 항상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나는 예수에게 관심이 없잖아요? 거짓말들 하지 마시라고요. 다른 거에 더 관심이 많잖아요? 그건 항상 가변적이란 말이죠. 내 자식, 내 남편, , 명예, 이건 가변적이에요. 항상 나를 기쁘게 만들 수 없어요. 나를! 항상 변하지 않는 그 존재만 나를 기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예수 믿으라.’는 말이에요.

아니, 내 사랑하는 가족이 이렇게 예수를 모르고, 좀비의 상태에서, 뭔가 엉뚱한 것을 쫓아가고 있는데 기뻐요? 진짜 기쁘세요, 그게? ‘나만 아니면 돼예요? 그걸 성도(聖徒)라고 합니까? 그런데 어떻게 기뻐요? 늘 기쁘기만 해요? 어떻게 우리가? 아녜요.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가 가입(加入)하지 않았을 때, 그 인간들이 만들어낸 세상을 보면서, 탄식(歎息)하고 통곡(痛哭)해야 돼요. 그런데 나에게 하느님께서 쏟아부어주신 이 은혜와 복이,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그걸 떠올리면서, 그 때 잠깐 행복해지는 거예요.

그런데 내 관심이 또 거기에서 벗어나서 또 이 세상을 향했을 때, 또 고통스러운 거고, 이걸 반복(反復)하면서 사는 게, 성도의 삶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기쁜 척, 아무 걱정 없는 척! 그러지 좀 말란 말이에요. 그러니 딴 사람들이 오해(誤解)하잖아요. ‘나만 왜 이래?’ 아니 다 그래요. 마치 나만 성도다, 이걸 증명하고 싶어서, 연극(演劇)들을 하는 거예요. 속지 마세요. 그렇게 이 세상의 실체를 보고, 하느님이 세운 그 나라를, 감사함으로 찬송하면서, 붙들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나라에서 새 몸으로 바꿔주는 거고.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더럽고, 불공평(不公平)하고 불합리(不合理)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분노해야 되는 게 아니라, 그건 당연한 거란 말예요. 여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보다 나은 세상 만들기와, 보다 나은 세상 만들기에 몰두(沒頭)하느라, 하느님마저도 방법과 수단으로 동원(動員)하고 있는, ‘에 대해서, 이 역사와 인생에 대해서, 분노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좀 더 착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게 뭔가 나쁘냐?’ 거기서 주인공이 누구냐고요? ‘라니까요. 하느님은 거기서 능력으로만 사용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하느님이 주인이 돼야 돼요.

 

사도 바울로가, 정말 집요하게 율법을 폭격(爆擊)하면서, 은혜를 설명하고 있는데, 9절부터는 할례(割禮)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또 다시 율법주의를 부수고 있어요.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게, 할례 받기 전이냐? 할례 받은 후냐? 물어보고 있죠? 아주 아브라함 이야기 지겹죠?

저는 로마서 4장이 제일 재미없어! 한 이야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그 만큼 중요하다는 거요. 이것이! 아브라함이 아주 귀가 가려울 것 같아. 저를 만나면 이야기할 거 같아요. ‘, 내 얘기 밖에 정말 할 게 없었냐?’ ‘아니 성경에 당신 얘기 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지금 아브라함이 천국에서 그럴 것 같지 않아요?

여러분이 한 번 대답해 보세요.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게 할례받기 전이에요? 할례 받은 후예요? 전이죠? 할례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건, 창세기 17장인데,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아요. 그런데 입만 열면 할례! 입만 열면 율법! 하는 너희들! 너희들이, 그 할례를, 그 율법을 지켜서, 하느님이 사랑하는,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럼 아브라함은 뭐냐? 이야기하는 거예요.

할례 받기 전에 먼저 의롭다 칭함을 받은 아브라함은 뭐냐? 그럼, 너희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니? 까지 물어보는 거예요.

 

(로마서 4:10) 10 언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입니까? 받기 전입니까? 할례를 받은 후가 아니라 받기 전의 일입니다.

 

정확하게 보고 있는 거예요. 정말 너희들의 행함으로, 할례나 율법 지킴이 사유(私有)가 되어서, 그것이 너희들의 의인 됨에 영향(影響)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느냐? 묻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의문이 들겠죠?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에게, 할례는 뭐 하려고 행하라고 시키는가? 이게 중요한 거예요. 이게 오늘 본문에 키 포인트(key point)예요.

왜 믿음으로 이미 의롭게 된 여러분을, 묵시 속에 완료되어 있는 여러분을, 왜 굳이 이 역사라는 다른 차원(次元)을 만들어서, 내려 보낼까요? ? 그게 그 이야기거든요. 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면 천국(天國)으로 데리고 가든지, 가나안 땅으로 얼른, 납작 들어서 옮기든지 하시지, 왜 그가 인생에서 할례라는 그걸 경험(經驗)하게 하실까요?

 

(로마서 4:11) 11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것을 확인하는 표로 그는 할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음으로써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어차피 할례! 세례는 새크라멘트(Sacrament)예요. 그죠? 심벌리즘(Symbolism)이란 말입니다. 그 자체가 효력(效力)이 있는 게 아니란 말예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한 건,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라고 인정을 받은, 그 구원(救援)의 현실이, 확실하고 변개(變改) 될 수 없는, 고정적이며 완료적인 현실임을, 확증하는 표식(標式)이었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인생 속에서 그걸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그 할례 행함이, 어떤 효능과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설명이요, 표식이란 말예요. 그게 ()친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게, 고게 진짜 할례거든요. 그래서 그 밑에 쪼갠 고기 사이로 하느님이 지나가는 그림이 붙어 있는 거예요. 그가 믿음으로, 하느님의 희생(犧牲)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게, 그게 할례란 말이에요. 하느님이 할례 받음으로 그가 의롭게 된 것! 요걸 설명(說明)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고추 끝을 자르게 하는, 할례의 삶을 경험(經驗)하게 하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의 인생이며 역사의 역할(役割)인 거예요.

이 역사는 율법 아래 붙들린 채로 움직여 가죠, 할례는 율법(律法)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를 율법의 종이라고 하잖아요, 성경이? 율법의 종! 율법 아래 났다 그러잖아요? 이 역사가 할례처럼, 이미 확정(確定)되고 완료(完了), 어떤 걸 설명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요. 그래서 이 역사를, ‘율법이라 하는 거예요. 이미 묵시(黙示) 속에 완료된, 어떤 일을, 역사가, 율법, 인본주의, 유대주의라는 걸 내놓으면서, 이 묵시 속에 완료된 이 현실이, 누구에 의해, 누구를 위해 완료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게, 역사란 말예요.

 

성경신학의 중요한 진술 중에, ‘종말(終末)은 창조(創造)의 완성(完成)이다.’란 말이 있어요. 그건 이미 완료된 새 창조가, 이 역사라는 과정을 통과(通過)하면서, 그 새 창조의 현실을 설명하다가, 결국은 종말을 거쳐서, 다시 원래의 새 창조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뜻이에요.

이미 하느님나라는 묵시 속에 완료가 되어 있어요. 그걸 요한이 올라가서 묵시를 보고, ‘, 여기 다 있네!’ 그리고 묵시록을 쓴 거죠? 요한계시록. 사도 바울로가 삼층 천에 올라가서, ‘아 여기 다 있네. 이게 나네.’ 내려와서,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었던 거예요. 봤다니까요. 모세가 올라가서, ‘, 여기 완료되어 있네.’ 내려와서 성막 지은 거 아닙니까? 히브리서에 나오죠? ‘내가 보여준 대로 내려가서 지으라.’ 하느님나라잖아요, 그게?

완료되어 있는 어떤 게 있단 말입니다. 그걸 역사가 지금 설명해내고 있는 거예요. 왜 너희들은 죽은 흙이며, 왜 너희들은 아담이며, 거기에 생기(生氣)가 부어지지 않으면, 하이 네페쉬 하야’, 생명(生命)이 못 되는 지를, 여러분은 여기서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그 생기를 붙드는 자가 되는 거죠. 그게 복()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말이에요. 하느님은 영원(永遠)한 현재 뿐인, 영원이라는 영역(領域) 속에서, 그게 뭔지, 아무도 설명해 낼 수는 없어요. 영원한 현재뿐인 영원이라는 영역이 있어요. 왜 영원한 현재 뿐이 없다고 하냐면, 그 나라는 하느님이 말씀으로 이렇게 창조해 내시는, 완성해내시는 나라이기 때문에 하느님나라거든요. 거기가!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현재 밖에 없다는 거요.

거긴 더욱 더, 건설(建設)되고 성숙(成熟)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냥 말씀으로 창조해내는 곳이기 때문에, 현재란 뜻이에요. 그게! 그러나 존재가 움직이기 때문에, 흐름은 있단 말예요. 이렇게 하고 사는 데가, 영원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라면 이러고 있어야 되는 거 아녜요? 그 말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의 말씀으로 창조해내는 그 나라! 그 나라는 무엇을 보태거나, 고치거나 발전(發展)시키지 않아도, 이미 충분(充分)한 완료(完了)의 나라란 말이에요. 거기는요!

그곳에 여러분이, ‘창세전(創世前)에 구원을 받아, 들어가 있다.’가 에페소서 1장이잖아요? 그런데 영원한, 그 영원과 다른 차원(次元)의 영원은, 역사로 중간에 뚝 끊어졌다가, 다시 영원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영원은 그냥 영원이고, 다른 차원의 역사가 잠깐 존재(存在)하다가 사라지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영원! 그 영원은 있는데, 그 영원과 다른 차원의, 역사라는 게 잠깐 생겼어요. 이게 뭐를 모형(模型)하느냐 하면 이 새 창조를 모형 하는 거라 그래요. 성경이, 그걸! 원형의 모형으로 역사라는 게, 요렇게 잠시 창조되었다가, 이 원형을 설명하고는 모형이 사라지는 거예요.

 

모형의 역할이 뭐예요? 모형 비행기 역할? ‘아 비행기가 요렇게 생겼겠구나.’하는 것을 설명해 주고, 또 하나는 요거 진짜 비행기 아니네, 이게 모형이잖아요? 이게 역사의 역할이며 인생의 역할이에요. 여러분의 옛 자아! 이게 새 사람을 설명하는, 하느님은 왜 새 사람을 우리에게 입혀줘야 하는가? 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피조물이 뭐예요.? 새롭게 창조된 게, 새로운 창조물이죠? 왜 새로운 피조물이어야 하는 가를 설명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이 옛 자아(自我)! 그렇게 완료된 묵시의 현실을, 모형으로 요렇게 만들어서, 역사 속에, 태초(太初)! 확 흩어버리는 거요. 혼돈(混沌)과 공허(空虛), 확 흩어버리고, 마치 대국이 막 끝난 바둑판을, 막 흩어버리고, 프로기사에게 정확하게 복기(復碁)하라 하면, 그 사람들 다 복기합니다. 하나도 빼 놓지 않고. 그것처럼 완료되어 있는, 이미 승리(勝利), 묵시 속의 현실을 모형으로, 역사 속에 혼돈과 공허로 확 흩고, 하느님이 복기해 나가면서, 하느님나라를 설명하는 게 역사란 말예요.

하느님이 새 것으로 하느님의 은혜(恩惠)로만 창조해 놓아야, 그게 진짜 영원히 갈 수 있는 가를, 설명하는 게, 우리의 이 역사의 역할이란 말이에요. 여기에서 여러분이, 이 역사를 어떻게 보다 진보(進步)시키고, 발전시키고, 계발시켜서, 지금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게 아니고, 인간들을 보다 성숙시키고 발전시켜,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게 우리의 이 삶의 목적(目的)이 아니라,.... 지리산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어차피 혼자 외롭게, 혼자 떠드는데, 아무도 못 알아듣는.

 

다른 예로 설명을 하면, 묵시라는 이 수직(垂直)의 현실! 왜 제가 묵시를 수직이라 하는가 하면, 이거는 한 번에 완료된 거니까, 묵시는 수직으로 서고, 여기에 하느님의 빛이, 말씀이 확 비추면, 이게 그림자를 드리워요. 이 묵시는 십자가로 완료가 되기 때문에, 이 십자가를, 묵시를, 빛으로 확 비추면 역사의 그림자가 수평(水平)으로 좍 생기는데, 이걸 역사라 그래요. 그런데 이건 실체(實體)가 아니잖아요? 하늘에 비행기가 가면 땅에 그림자가 생기는데, 이 실체에 의해 그림자가 같이 가지만, 얘는 실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걸 역사라 그래요.

역사는, 이것 자체의 의미(意味), 가치가 있는 게 아닌, 진짜 가치인 묵시를 설명하는 역할! 그리고는 불살라지는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란, 홀로 독립적(獨立的)으로, 방향(方向)을 정하여,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완료된 묵시에 의해, 이미 결정된 방향으로 흐르도록 되어 있어요. 이 묵시와 관계없이, 얘가 우발적(偶發的)으로 움직여지지 않아요. 그걸 예정(豫定)’이라 그래요. 할례가, 예수의 할례를 설명하는 용도로 주어진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 봤잖아요? 할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그 진짜 할례의 현실을 설명하는 거라 했으니까! 그 할례가 예수의 할례를 설명하는 용도로 주어진 것처럼, 이 율법주의, 이 유대주의, 이 율법 아래에 있는 이 세상은, 할례는, 왜 예수의 희생(犧牲)으로만 하느님나라가 완성될 수밖에 없는 가를 설명하는, 그리고 확증(確證)하는 역할로 잠시 있다가, 사라질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산호초(珊瑚礁)가 계속 없어져야 돼요. 이제 오존층이 뻥 뚫릴 거예요. 그리고는 결국 이거 없음이네, 결정날거란 말입니다. 오존을 어떻게 막을 거예요? 뚫어진 오존층을!

구름으로, 위와 아래가 갈라지는 그 시나이산에서의 율법 수여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하느님께서 중보자 예수를 모형 하는 모세에게, 하늘의 법을 모형 하는 율법을 주시죠? 그런데 산 위로 올라오라 그래요. 산 위! 누가 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겠느냐? 이걸 들면 뭐가 확 드러난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감추어짐 없이 드러난다, 그러죠.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산 위의 동네는, 예루살렘이에요.

시온산 위에 예루살렘이 있으니까! 그건 곧 율법주의죠. 이스라엘이에요. 이 인간 세상, 역사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빛이 확 들리면, 이 산 위의 동네, 이 예루살렘이, 율법으로 근사하게 자기를 치장(治裝)한 동네가, 그 실체가, 시커멓게 확 드러난단 이야기예요. 그래서 산 위의 동네거든요. 그런데 이 이스라엘은, 산 위의 동네는, 산 위의 현실(現實)!

그러니까 묵시(黙示) 속의 현실을 바라보며, 하늘의 현실을 바라보며, 살도록 택()해진 하느님의 백성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들이 그 위를 못 보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유대인들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이스라엘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하느님이 왜 굳이, 하늘의 법을 모형(模型) 하는 율법을 주는데, 왜 굳이 산 위로 끌고 올라가느냐 하면, ‘너희들, 산 위의 동네라고 하는 이스라엘아! 너희들을 바로, 이 산 위의 현실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못 본다는 거예요. 하느님이 열어 주지 않으면, 그래서 구름으로 가려버리고, 예수의 모형! 하느님의 아들의 모형! 중보자의 모형인 모세에게만, 하느님이 이야기를 하세요. 율법을 주는데, 언약(言約)이 체결(締結)되고 있는 거예요.

지켜라! 안 지키면 죽어! 지켜!’ 에덴동산의 그 선악과의 이야기가, 또 한 번 반복되는 거예요. ‘지켜라!’ 그런데 아래 사람들이, 이 산 위의 동네 사람들이, 산 위를 봐야 되는데, 산 아래에 착념하다 보니까, 산 아래의 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게 하느님이다!’라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을 폭로(暴露)시켜내는 거예요.

산 위의 법! 하늘의 법이, 율법이 내려와서, 이들을 광야교회로 끌고 가는데, 거기에서 어떻게 폭로시키죠? 다 죽어야 될 자로 폭로시키고, 죽이는 거예요. 광야(曠野)에서! 인생에서! 이게 역사의 실체란 말입니다. 하늘의 법이, 묵시가 내려와서, 그들을 끌고 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구름이 움직이면 가고, 구름이 서면 선거예요. 묵시가 움직이는 대로 가는 거예요. 이게 역사예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뭐 열심히 노력하고, 열심히 애를 써서,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완성(完成)되고 결정(決定)되어 있는, 그 하늘의 현실을 이 세상에서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가 만들어낸, 하느님과 관계된 하느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데, 그 십자가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내었기에, 그 교회를 개혁해야 되냐고요?

교회는 개혁하여, 세상 사람들이 다 칭찬(稱讚)하는 곳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몇 명의 하느님 백성들이, 도대체 인간이란 존재들은, 이렇게 하느님의 은혜가 떠나면, 죽은 흙일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를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뭔 놈의 개혁은 한다는 거예요, 도대체가?

 

율법을 올바로 이해(理解)한 사람들은요, 그 율법을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되는 거예요. 이 역사가, 율법 아래에 움직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 예수가 없으면 큰일 나는구나.’ 그 율법이 예수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율법이 선()하다고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 말은, 율법의 세목을 다 지켜내야 된다는 말이 아니잖아요? 율법이 하늘의 법이니 다 지켜야 된다? 율법을 지킨다는 건, 율법의 내용인 예수를 믿는다.’란 뜻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율법이 이 율법의 세상이 선한 것으로 사용되어져서, 율법은 선하다고 하는 거예요. 율법은 그걸 지키는 게 선한 게 아니라! 반드시 하느님께로, 예수께로, 끌고 가기 때문에 선한 거예요. 율법이!

그러나 하느님의 선택(選擇) 밖의 사람들은, 그걸 갖고 자기의 자존심과 가치와 영광(榮光)들을 챙겨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망()하는 거예요. 거꾸로들 알고 있어요. 잘 지켜야 살고, 안 지키면 죽는다고 알고 있잖아요? 그 율법! 그 자체가, 하느님나라에 선한 법으로 사용되는 게 아니라, 예수가 우리를 위해 할례당하여 죽었으므로, 이 나라가 완성됐다는 것을 믿고, 그 분의 은혜만 의지하는 게, 하늘의 법이에요. 그게 하늘의 통치원리(統治原理)잖아요?

그러한 언약이, 구름 위에서, 하느님과 모세와 언약이, 체결되고 있는 거예요. 모세는 예수의 모형이라 그랬죠. 그 언약은, 예수의 피로 성취되는 하느님나라에 대한 언약이라 그랬어요. 그걸 히브리서 9장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히브리서 9:15-17) 1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먼젓번 계약 아래서 저지른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유산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16 상속에 관한 유언이 효력을 내려면 그 유언을 한 사람의 죽음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17 유언이라는 것은 유언을 한 사람이 죽어야 효력이 있는 것이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이 역사 속에서 죽는 거고, 모세가 역사를 상징(象徵)하는 광야(廣野)에서, 죽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나라가 오는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하느님 아들과의 언약은, 하느님의 아들의 피 흘림이 전제가 되는 언약이에요. 피 흘림이 없으면, 언약이 발생(發生)하지 못해요. 그래서 피 흘림이 없으면, 생명이 없는 거예요. 용서함이 없는 거예요.

하느님의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선,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노력이나, 열심이나, 자격도 보탤 수 없다는 걸, ‘오직 예수의 피로만, 너희들은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설명하는 거란 말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기 비움, 그 십자가, 그 피 흘림, 부어주심에 의해서만, 하느님의 언약이 성취된다는 하느님의 그 주체자(主體者) 되심, 하느님의 그 주권(主權)을 설명하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에페소서 1장으로 갈게요. 창세전 언약!

 

(에페소서 1:3-7)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6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은총으로

 

자 그렇게 우리가 먼저 복을 받았다는 건, 완료된 하느님나라, 그 안에 내가 들어가, 내가 하느님나라가 된 거예요. 내가 거룩한 나라잖아요? 베드로가 그러잖아요? 우리는 거룩한 나라라고. 내가 하느님나라가 된 거란 말입니다. 그게 복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완료의 세계! 묵시(黙示)의 세계! 그게 복인데, 그 복을 받은 자들이, 이 땅에 내려와서, 이 역사 속에 내려와서, 예수의 피가 아니면, 도저히 그 나라가, 나라가 될 수 없다는 걸, 증명(證明)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역사와 인생의 처음 자리, ‘아담,’ 흙이잖아요? ‘없음!’ 그걸 확인하고, 이것들이 만들어내는 건 나라도 될 수 없고, 건축(建築)이 될 수 없구나. 그래서 건축자들아, 건설을 멈추고, 건축을 멈추고, 모퉁이 돌로 내려오신 예수를, 모퉁이 돌삼아, 하느님의 지으시는 그 나라를 붙들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이 역사의 역할이, 복 받은 자들이 내려와서, 그 복의 실체를 배우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창세기 때부터, 하느님의 백성은, 복부터 받고 시작하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지자마자,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구원받았다 그랬어요. 창세기 3:15절이 원시복음(元始福音)이니까요. 그 복음을 이해하고, 아내의 이름을 산 자의 어미라고 지었으니까.

우리는 여인의 후손! 예수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거구나라는 고백(告白)을 한 거란 말입니다. 그게!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기 전에, 아니 에덴동산이 만들어지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묵시 속에서 구원(救援)받은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복 받은 사람이 이 땅에 내려와서, 그 복을 갖고, 이 세상의 실체를 알아먹을 수 있는 복을 갖고, 딴 복이 아니라! 이 역사와 인생의 실체를 알 수 있는 복을 갖고, 그걸 진짜 인식(認識)해내는 걸, 역사와 인생이라 그런단 말예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지자마자 복 받고, 그 다음부터, 선악과 따먹으면서, ‘, 이게 우리 죽은 흙 맞네.’ 폭로(暴露) 당하는 거예요. 복 받자마자 선악과 먹는 거예요. 따라서 복 받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내가 죄인 맞네요.’를 먼저 배워야 되는 거예요. 그게 복 받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 역사와 인생은, 도저히 가치가 될 수 없는 거구나를 배워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망해 보기도 해야 되고, 이 세상 거들을 많아 모아 놓았다가, 이게 허무(虛無)하다는 것도 배워야 되고, 또 내가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여전히 변하지 않는 자기의 모습을, 실체를, 올바로 바라볼 수도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복 받은 사람은 자주 망하고, 자주 개차반이 되고 그래요. 그러니까 막 살아야지!’ 요게 마귀(魔鬼)예요.

 

 

(창세기 1:27-28) 27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28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創造)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어요. 하느님이 복을 주시면, 그들이 세상을, 땅을 정복(征服)하게 되죠?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이 세상의 후사(後嗣)라 그러죠. 상속자(相續者)예요. 그러면 이 세상을 상속해 준다는 거예요? 아니, 요 세상 얘기하는 거예요. 복 받은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완료하신, 그 하느님에 의해,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이 세상을, 받게 되어 있어요. 다스리고 정복하게 되어 있는데, 자기들의 힘으로 정복하고 건설하겠다고 하는 자들이, 그 세상을, 마귀의 세상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복 받은 아담과 하와가, 바로, 그 다음에, 선악과 따먹고 마귀 짓하는 거, 구원 받은 성도가 말씀으로, 은혜 받았다고 하고, 돌아가면서 싸우는 거, 생경(生硬)한 일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성도는 반드시, ‘그래서 예수가 필요해요로 가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복을 받은 이들이 제일 처음 자각(自覺)해야 하는 게 난 죄인(罪人)이구나!’ 이거예요. ‘난 죄인(罪人)이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아이고, 우린 죽은 자 맞네!’ 이걸 자각하게 되고, 창세기 315절의, 그 원시복음을 듣고, 그 말씀 속에서, 그 여인의 후손(後孫)의 은혜로, 산 자가 되는 그 구원의 현실을 이해하고는, 하느님 앞에, 면목 없는 죽은 자로, 다시 이렇게 내려가는 거! 진짜 아담이 되는 거! 난 아무 것도 할 게 없어서, 두 번째 아담인 예수가, 나를 그렇게 없는 자!’ 아담으로 만들어줘야 나는 비로소 살 수 있다는 걸, 아는 거. 이게 이 세상 아담무리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하고 가야 할 일이라 말입니다.

 

하느님이 왜, 하느님의 첫 번째 백성인 아담을 지으시고, ‘이라고 지었겠어요, 이름을? 아담이 흙이라 그랬죠?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 앞에서, ‘으로 존재해야 되는 거예요. ‘없음으로 존재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하느님이, 하느님의 거로 다 줄 수 있어요. 그래야 창조의 하느님이, 찬송을 받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스스로 자기 복제(複製), 자가 발전, 이런 걸 해서, 그 존재됨의 기여(寄與)를 하면, 흙과 하느님이 영광과 찬송을 나누어 가져야 돼요.

그런데 하느님은 내 영광과 찬송을 누구에게도 안 나눠준다.’ 그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거기에 기여가 되면 안 돼요. 성도는, 하느님 앞에 흙이어야 돼요. 그런데 그 , dust, 없음, 아다마이고 싶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의인(義人)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러잖아요? 하느님이 그렇게 만들어서 보내거든요.

그래서 있음의 흉내를 내는 거! 그게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역사란 말이에요. 그러나 성도는, 반드시 그러한 있음의 흉내가, 마귀의 발광(發狂)인 것을 알게 돼요. 그리고는 그 있음의 흉내를 멈추고, 죽은 흙으로, 하느님 앞에 다시 서게 되는 거요. 아담 보세요. 선악과 따먹고, 기세등등(氣勢等等)하게, 산자 행세(行勢)하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죽음으로 가는 길임을 알게 되죠.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죽은 흙으로, 아담으로, 자신의 처음 자리를 지키고 인정(認定)하는 게 사는 길임을, 알게 돼요. 아담이!

그러니까 복 받은 자들은, 다 자신들의 처음 자리인, 죽은 흙의 자리로 폭로가 되는 그 길을, 걷게 되어 있는 거예요. 망하셨어요? , 복 받으신 거예요.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게 예수 믿는 성도야? 난 아냐. 가짜일지도 몰라!’ , 복 받으신 거예요. 믿지 않는 자들은, 절대 그 고백을 못 해요. 믿는 자만, 그 고백을 할 수 있어요. ‘나 아담 맞네, 나 죄인 중에 죄인이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끊어줘야 되지? 아 예수!’ 이거까지 알고 가야 돼요. 그렇게 이 역사와 인생은, 복 받은 자들의 처음 자리 확인과, 그러한 죽은 흙들에게 임한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쳐지는 장이에요.

욥도 마찬가지죠? 욥기가 어떻게 시작해요? ‘욥은 의인이다.’ 그래놓고 40장 내내, 욥의 치부(恥部)만 들춰내는 거죠. 그게 역사란 말이에요. 우리의 인생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결국에, 나중에, ‘내가 하느님을 보게 됐네요!’ 이게 역사란 말이에요. 그게 의인이라니까요. 욥이 처음에는, 자식들 머리수대로 제사 지내고, 온갖 율법의 행위를 다 해요. 그런데 광야 40장 내내, 자기의 죄 된 모습을 폭로 당하고 난 다음에, 그런 거 했다는 말이 없어요. 율법에서 빠져 나오는 거예요. 그게 의인의 삶이란 말입니다.

 

아브라함? 마찬가지죠?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에서 나오자마자, 복부터 받아요. 그런데 복 받고, 자기가 얼마나 추악(醜惡)하고 불가능(不可能)한 자인지를 폭로 당하는 삶을, 인생을 산다 말입니다. 복을 받고! 151절에서는 상()까지 주었대요. 상급(賞給)! 내가 상이다! 그러잖아요? 복 주고 상 줬는데, 그의 인생이 없음으로 드러나 버리는, 폭로되어 버리는 거예요. ‘아 나는 하느님이 주시는 복 아니면, 진짜 존재일 수도 없구나!’ 이거 배우는 거, 이게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성도가 받은 복은, 묵시 속 완료의 현실, 하느님이 홀로 이루신, 현실을 말하는 거예요.

창세기 12장으로 가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면서,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 그러죠? 그건 성경이 잘못 번역한 거예요.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너는 복이다!’ 그러니까 복은, 여러분이 하느님께 잘해서 받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統治)를 받아, 하느님의 뜻대로 존재하는 여러분 자신이 복이에요.

그래서 그걸 하느님나라라고 하고, 그걸 성전(聖殿)’이라고 하고, ‘새 예루살렘이라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복이에요. 그래서 이 복은, 지옥에 가도 복이야! 이걸 이해하셔야 돼요. 그러려고 하면,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되고,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돼요. 딴 것은 다 필요 없어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아 네가 복이다.’ 그래놓고, 바로 그 밑에 절에서, ‘너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래요. 그러면 천하 만민 중에, 구원 받는 그 백성! 그 백성이, 뭘 받는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아, 네가 복이다.’ 그랬으니까, 아브라함의 인생을, 그대로 유전(遺傳) 받는 거예요. 여러분이요. 그게 복이에요.

아브라함의 인생이 뭐였어요? 뭔가 하느님의 그 역사에 기여(寄與)를 하려고 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자기 심장에 칼을 꽂고 난 아니네요 하느님. 하느님의 언약은 홀로 성취(成就)하는 거네요. ’야훼 이레로 끝나는 거예요. ‘하느님이 준비하신 제물(祭物), 어린 양에 의해, 완료되는 게 하느님의 언약성취네요.’ 알고 가는 거! 그 아브라함의 인생이 여러분의 것이 되는 거예요. 그게 복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아 네가 복이다!’ ‘너를, 너의 인생을, 네 후손! 믿음의 후손들에게 내가 나눠줄 거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아브라함의 인생이, 바로 십자가의 인생이었잖아요?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만, 그 아브라함의 인생, 십자가의 인생을, 거부(拒否)하거나, 그런 인생이 닥쳤을 때, 하느님을 원망(怨望)하거나, 그리로 안 가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축복(祝福)하면 축복하고, 아브라함을 저주(詛呪)하면 저주받는다.’라고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뭔데? 아브라함의 그 인생이, 수긍(首肯)이 되고 동의(同意)가 되는 자가, ‘복 받은 자란 뜻이에요. ‘그거 아냐. 뭘 다 하느님이 해? 우리도 해야지.’ 이게 저주 받은 자란 뜻이에요. 그렇게 복 받은 아브라함, 아니 복이 된 아브라함이, 15장에서 의인이 되는데요, 그 선포(宣布)의 현장(現場), 다시 한 번 보고 갈게요.

 

(창세기 15:6) 6 (아브람)가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시어,

 

이 어절에서 (아브람)가 야훼를 믿으니를 히브리어로 보면, ‘제다카 로 와야흐 세베하 바이흐와 웨에헴입니다. 여기서 믿으니라고 번역(飜譯)이 된 히브리어가, ‘웨에헴인데, 이 단어가 와우 계속법이라고 했죠? 그리고 히필,’ 사역형 동사예요. 히브리어에는 그런 용법이 있거든요. 사역형이란 하느님 시킨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믿었다가 아니라, 하느님이 믿게 하셔서 의인 만들었다는 뜻이에요. 그래놓고, 믿게 하셔서 의인 만들어놓고, 인간들이, 이 인본주의, 유대주의, 율법주의가, 절대 가고 싶어 하지 않은 길을, 끌고 가는 거예요. 그 하느님의 믿음이.

()’가 뭐라고 했어요, 여러분? 의로운 일을 많이 하는 게 의인(義人)이에요? 디카이오수네, 짜다크라는 이 ()’,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이 관계가 요구하는 걸 성실(誠實)하게 수행(遂行)해내는 상태라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이 의 관계가, 진짜 의 관계가 되려면, 어떻게 되야 되죠? 하느님은 창조주로 계속 계셔야 되고, 우리는? 하느님 절대의존의 피조물(被造物)로 존재해야, 이게 의 관계란 말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믿음에 의해, 자기의 의지(意志)와 상관없이, 기호(嗜好)와 상관없이, 아니, 4,000년 전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던 곳에서, 광야! 화장실 가려면 땅을 파야 되는 이런 곳으로 끌려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끌고 가는 것에 순종(順從)할 수밖에 없는 이걸, ‘의인이라 해요. 착한 일 몇 개 해놓은 그걸 의인이라 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성경에서는! 이렇게 일단 의롭다고 해놓고, 하느님이 언약을 주시는데, 그리고 그 밑에, 그 유명한 쪼갠 고기 사이로, 하느님이 지나가시는 그림이 붙어 있는 거란 말이에요.

 

오늘 본문 어려워요. 그래서 이렇게 길게 설명해 드리는 거예요. 이걸 다 이해하시면, 여러분 이런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다 이해(理解)할 수 있어요. 이 쪼갠 고기 사이로, 언약의 당사자가 지나가는 건, 당시 고대시대 때, 약속을 하고 언약을 체결할 때는, 언약 당사자(當事者)가 제물(祭物)을 쪼개 놓고는, 가운데를 같이 지나가므로 말미암아, 이 언약이 깨지면, 이렇게 쪼개지는 거야, 죽일 거야! 이 뜻이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강대국(强大國)의 왕과, 약소국(弱小國)의 왕이 계약을 체결할 때는, 약소국의 왕만 지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 나라와 백성을 대표해서! 강대국 왕이 지나갈 필요가 없잖아요? 주권(主權)을 내가 갖고 있으니까. 그러면 아브라함이 지금, 아브라함의 후손을 대표로 거기를 지나가야 돼요. 아니면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같이 지나가던가. 하느님이 강자니까.

그런데 횃불과 연기, 구름이, 불기둥이(불기둥, 구름기둥으로 현현(顯顯)하신, 임재(臨齋)하신, 하느님이에요. 횃불과 연기가! 하느님이 지나가요. 혼자! 아브라함이 대표가 되어, 아브라함이 언약 당사자! 대표가 되어야 되는데, 하느님이 하느님의 백성의 언약 대표가 되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예요.

 

(예레미야 34:18-20) 18 너희들이 송아지를 두 토막으로 갈라 놓고(쪼개서) 그 토막 사이로 지나가며 내 앞에서 계약을 맺었으면서도 이제 그 조문을 지키지 않고 계약을 어겼으니 나는 너희들을 그 송아지 꼴로 만들고 말리라. 19 유다와 예루살렘 고관들, 내시들과 사제들 지방유지들 할 것 없이, 갈라 놓은 송아지 토막 사이로 지나간 자들을 20 죽이려고 달려드는 원수의 손에 넘겨 주어, 그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의 밥이 되게 하리라.

 

이게 그 모형(模型)이에요. 쪼갠 고기사이로, 이스라엘! 남 유대와 북 이스라엘의 대표(代表)가 지나갔어요. 그런데 언약(言約)이 깨어졌어요. 하느님이 다 죽인다!’ 그러는 거예요. 대표가 지나갔지만, 어겼기 때문에 다 죽인다!‘ 이게 원래 우리가 가야할 길이란 말이에요. 이게! 그런데 이 백성과 방백들의, 제사장들의 대표로, 우리의 대표로, 예수님이 지나가버린 거예요. 십자가에서! 그리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쪼개진 거예요. 언약이 깨어졌거든요. 그 이야기를, 아브라함의 할례(割禮)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거예요. 언약 후손(後孫)의 대표로, 하느님이 서셨다는 건, 하느님이 모든 백성을 다 품어 안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그 아브라함의 후손! 교회의 그 죽음을, 그 사망을 예수가 먹어버린 거예요. 우리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이 먹어버린 거예요. 여기에서 쪼개다라고 번역이 된, 그 히브리어 단어가, ‘바타르라 그랬습니다. 바타르!’ 언약이 부결(否決) 되면, 반드시 쪼개져야 되는데, 이 쪼개짐을, 성경에 끊어진다, 잘라내다이런 단어로 표현(表現)을 한다 말이죠.

그런데 그 언약의 내용이 뭐였느냐 하면? 내가 너의 후손을 주고, 백성! 땅을 주고, 나라! 국토죠? 내가 너의 왕이 될 거야, 상급이 될 거야. 주권! 국민, 주권, 영토. 나라의 3요소잖아요? 하느님나라를 약속하는 거잖아요? 언약의 내용이에요. 이게! 하느님나라! 그런데 그게 또 우리예요.

하느님나라가, 하느님의 쪼개짐으로 완성이 될 거라는 걸, 아브라함에게 알아먹으라고, 그림으로 설명한 게, 창세기 15장이란 말이죠? 그리고 너는 의롭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의로운 자, 복 받은 자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어떤 자임이 폭로된다? ‘나는 죄인이네, 나는 죽은 흙이네이게 폭로 된다 그랬죠?

그러면 아브라함이 의인이다. 믿음이다. 이 은혜의 언약을 받은 다음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돼요? 창세기 16장에서! 자기의 힘으로 뭔가 만들어 내는 모습으로 드러나야죠? 이게 율법주의(律法主義)잖아요? 역사(歷史)잖아요? 이게! 그런데 그건 아니다. 꽝이다.’가 하느님의 선언(宣言)이고!

그래서 창세기 16장에서, 은혜언약 바로 다음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나오는 거요. 인간 측의 열심과 노력으로, 뭔가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이 그걸 인정(認定) 안 해줘버리고, 다시 설명을 하세요. 할례가 뭔지 알아? 내가 창세기 15장에서 너에게 얘기한 그게 뭔지 알아? 하고, ‘할례 행하라!’ 한단 말이에요. 이게 여러분의 인생에서 겪어내야 할 일이란 말입니다.

보세요. 언약이 깨어졌어요. 이젠 누가 죽어야 되는 거예요? 창세기 15장에서 언약을 했단 말이에요. 쪼갠 고기 사이로 하느님이 지나갔단 말이에요. 그런데 언약이 깨졌어요. 아브라함이 거기에 뭘 보태려고 했단 말입니다. 하느님 혼자 한다, 그랬는데, 아브라함 때문에 언약이 깨어졌어요. 그러면 하느님이 쪼개져야 되잖아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마저도 죽일 만큼, 집요한 자아, 자아 챙기기, 자기 존재성, 주체성 챙기기의 달인(達人)들이라는 뜻이에요. 그 게요! 그런데 보세요. 왜 아브라함이 그렇게 쉽게 언약을 깼을까요?

 

(창세기 16:1)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마침 사래에게는 하갈이라는 에집트인 몸종이 있었다.

 

갑자기 에집트(애굽)가 등장(登場)하죠? 이스라엘이, 하느님에 의해 애굽으로 보내졌어요. 하느님이 보낸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끌어내는 거죠? 애굽은 율법의 종, 이세상의 종인 하느님의 백성들의 모습이죠? 거기서 꺼내는 거예요. 여기도 보세요. 애굽 여자라는 말이 굳이 등장하는 건, 바로 이제 율법이라는 게, 율법의 종의 개념(槪念)이 여기서 등장한다는 걸, 암시하는 거요. 하갈! 애굽 여자! 이런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언약을 주셨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조금 어울리지 않죠? ‘내가 너희들에게 후손을 주겠다.’ 그랬으면, 그 약속을 받은 즉시 사래가 생산하였더라, 잉태(孕胎)하였더라해야 맞잖아요? 그런데, 약속을 주셨더라, 그런데 생산(生産)치 못하였더라.’ 왜 하느님이 이 꼴로 만드시냐고요?

약속을 줬어요. 복을 줬어요. ‘넌 의인이다!’하고 선언해 놓고, 생산을 못하게 만들어버렸어요. 이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구원을 받았다면서요? 하느님의 백성이라면서요?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다운 삶이 생산이 안 돼. 그 때 우리가 뭘 하려고 해요? 기다리지 못하고, ‘하느님이 약속으로 성취해낼 거야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여기에다 화장을 떡칠을 하는 거죠. 도덕, 윤리, 이런 걸 가지고, 이스마엘을 만들어 낸 거예요. ? 증거가 필요해요. 믿음이 없으니까. 증거가 필요한 거야. 내가 의인이고 복 받은 자라는 증거가 필요해! 하느님이 나에게 약속을 주셨는데, 증거가 없어. 생산이 안 돼요. 그러면 뭐라도 해야 될 거 아녜요. 요게 율법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갈이라는 여자가 애굽 여자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리고 요게 기각(棄却)되는 거예요. 부정되어 버리는 거란 말입니다. 이 시대에, 이 교회 안에 파고 들어온 율법주의가, 바로 그거예요. 알미니안주의! 성화론! 이런 것들이 바로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왜곡된 성화를 이야기하는 거요. 열심히 노력해! 분노해! 투쟁(鬪爭)! 만들어! 기여해! 이런 거 해놓고, ‘우리는 할 수 있잖아?’ 이게 하갈이에요.

하느님이 왜 후손을 주겠다고 하고, 생산치 못하게 하셨을 거 같으세요? 그가 진짜 나는 생산할 수 없는 자라는 자각(自覺)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거예요. 그래야 하느님이 주셨다는 걸 알잖아요? 하느님은, 그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까지, 다 사라지기를 기다렸던 거예요. 그런데 조바심이 났어요. 이렇게 가다가는 진짜 안 될 것 같아. 인간의 생각이죠.

아브라함이 힘이 남아 있을 때,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하나 낳자. 그래서 낳은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이 그걸 인정하시 않아요. 여러분, 언약의 성취 과정(過程), 자기들의 열심히 필요할 거다 하는 게, 바리새인이었죠? 율법 지키고, 제사 지내고, 할례 받고, 이게 하느님의 백성 됨에 기여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잖아요? 요게 율법이잖아요? 요게 예루살렘이란 말이에요. 지상(地上)의 예루살렘! 그런데 그 율법!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왜 돌았다고요? 이게 인생이고, 역사의 모형! 약속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데, 자기들의 자격과 조건을 자꾸 본 거예요. 그리고는 우리 힘으로는 안 돼!’라고 하느님의 약속을 무시했기 때문에, 역사를 산거잖아요? 그리고는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거구나를 보인 게, 광야 1세대가 다 죽은 거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어야, 하느님이 살릴 수 있어요. 그래서 2세대가 은혜로 그냥 들어가는 거예요. 똑같은 인간들인데도 불구하고! 마찬가지예요. 아브라함이 약속의 후손을 생산하는 건, 하느님의 약속으로 되는 거지, 그들이 하느님의 그 후손 생산에 뭘 도와주어서 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이 했단 말이죠? 이게 율법이란 말이죠. 그게 바로 마귀란 말이에요. 에덴동산에서 뱀이, 죄가, 아담을 어떻게 미혹(迷惑)했나요? ‘네 힘으로 하느님 돼! 너 할 수 있다니까.’ 그랬잖아요? 이게 율법이란 말입니다. 그걸 하느님이, 애굽의 종으로 ,설명해 준 거잖아요?

그렇게 종 되었던 곳에서, 하느님이 뽑아내어, 그들이 먹고 싶은 거 못 먹게 하고, 하느님이, 그들이 아주 귀찮아하는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여서, 하느님나라로 끌고 가는 게, 역사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갈을, 애굽사람이라고 밝히는 거예요. 하느님의 언약, 약속이 떨어진 상태에서, 인간의 행위로 그 약속에 일조(一助)를 하려고 하는, 그게 바로 애굽의 종, 마귀의 종의, 현실(現實)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하느님에 의해, 애굽으로 보내지고, 그들이 가고 싶어 간 게 아니에요. 그런데 하느님이 보내놓고, 거기서 꺼내는 게 구원(救援)이라는 게, 무슨 소리냐고요? 자기가 보내놓고! 구원의 현실을 설명하는 거란 말입니다. 성경은 한 치의 오차도 없어요. 갈라디아서를 보면 정확(正確)하게 바울로가 그걸 이해(理解)했어요.

 

(갈라디아서 4:21-26) 21 율법으로 살기를 원하는 여러분, 한 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까? 22 율법서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하나는 여종의 몸에서 났고 하나는 종이 아닌 본부인의 몸에서 났습니다. 23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인간적인 육정의 소생이었고 본부인에게서 난 아들은 하느님의 약속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24 이것은 비유로 한 말인데 그 두 여자는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산에서 나와서 노예가 될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그것이 하갈입니다. 25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나이산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지금의 예루살렘에 해당합니다. 현재 예루살렘은 그 시민들과 함께 종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26 그러나 하늘의 예루살렘은 자유인이며 우리 어머니입니다.

 

하갈! 계집종! 시내산! 율법! 옛 언약!’ 이게 모두 같은 내용이고, ‘사라! 자유하는 여자! 하늘의 예루살렘! 우리 어머니! 새 언약!’ 이게 다 같은 내용이에요.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고, 언약을 받아요. 언약 체결(締結)의 현장에서는, 하느님이 다 하신다는 메시지가, 쪼갠 고기 사이로 하느님 혼자 지나가시는 것으로 그려졌다 말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어요. 그런데 바울로가 하갈을 율법이라 하잖아요? 여기서! 시내산이라 그러잖아요? 아브라함이 율법으로 들어간 거죠.

복 받은 자가! 상 받은 자가! 의인이!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人本主義)로 다시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거 아니구나!’를 배우는 거예요. 우리가 그래서, ‘만을 위해 사는 거예요. 지금도! 기도도 나만 위해서 하고, 내 새끼! 내 자식! 내 부모! 그건 란 말이에요. 우리 교회! ‘란 말이에요.

그거! 예배(미사)도 나를 위해서 하고, 헌금도 나를 위해서만 하는 거예요. 이게 율법주의예요. 다른 게 아녜요. 이게 인본주의란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지금 그렇게 마귀의 종처럼 살고 있다니까요.

그런데, 그게 잘 하는 것처럼, 잘 사는 거처럼, ‘, 분노하여 공평한 사회 만들고, 훌륭한 사람 되고, 착한 사람 되자!’ 이게 마치 잘 하는 것처럼, 우리는 마구 만들어내고 있는데, 성경이 그걸 쫓아내라!’ 그래요. 어차피 낳은 거 놔둬라가 아니라, ‘쫓아내라!’ 그거 별 가치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으니까, 떨이로 계산해서, ‘줄 게가 아니라, ‘쫓아버려라!’ 그래요. ‘, 그 쓰레기 좀 갖다 버려!’ 그런다니까요.

 

(갈라디아서 4:30) 30 그런데 성경에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여종과 그의 자식을 쫓아 내어라. 종의 자식은 결코 본자식과 같은 상속자가 될 수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상속(相續) 못 받아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행함을 하느님 앞에 가져가도, 하느님이 그걸 불로 태워버려요. 계집종의 아들, 계집 종, 하갈의 아들, 다른 말로 율법의 행위(行爲), ‘내쫓아야할 것이지, 우리가 추구(追求)해야 할 게 아녜요. 그건 100명을 낳아도, 1000명을 낳아도 다 쫓아버리세요. 그 중에서 골라서 쓰지도 않아요. 다 쫓아버리세요.

왜 그런지가, 창세기에도, 갈라디아서에서도 분명히 나와요. 인간이, 율법 아래에서, 인본주의의 열매로 무언가 맺어내게 되면, 인간들의 열심으로 맺어내게 되면, 인간들은 반드시 그 열매로, 은혜 앞에서 면목(面目)이 없이 서 있는 자들을, 공격(攻擊)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하느님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어요. 그래서 이 자들을 못 들어오게 하는 거요.

 

(창세기 16:4) 4 아브람이 하갈과 한 자리에 들었더니, 하갈의 몸에 태기가 있게 되었다. 하갈은 그것을 알고 안주인을 업신여기게 되었다.

 

보세요. 뭔가 이제 기미(氣味)가 보이니까, 멸시가 들어온 거죠. 핍박(逼迫)하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21:9-10) 9 그런데 사라는 에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10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 계집종과 아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그 계집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사악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4:29) 29 그러나 그 때 육정으로 난 자식이 성령으로 난 자식을 박해하였는데 지금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그래요. 가난한 자들이 이렇게 핍박(逼迫) 받는 이런 세계! 이게 무슨 세상이냐? 분노하라! 봉기(蜂起)하라! 교회야, 촛불 들고 나가자! 공평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 만들자!’ 거기에. ‘그게 진짜 복이고, 그게 진짜 행복이 아니라,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게 복이다. 그러니까 그런 모습을 통하여, 인간들은 원래 이런 존재고, 역사는 이렇게 밖에 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우리 예수 믿자!’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런 방종(放縱)을 조장하는 이단!’ 이렇게 얘기하겠죠?

이렇게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 만들어 낸 열매는, 반드시 은혜를 핍박하게 되어 있어요. 지금도 똑같아요. 인도주의와 휴머니즘을 토대(土臺), 건강한 교회개혁(敎會改革), 평등하고 공평한 세상 구현(具現)! 자연보호 등을 외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혜를 붙들고, 그 앞에서 십자가의 피의 공로(功勞)를 찬양하고 있는 이들을, ‘저런 행동 없는 양심(良心)!’ 핍박합니다. 욕먹게 되어 있습니다. 신비주의(神秘主義), 기복주의자(祈福主義者)들에게 욕먹어! 개혁주의자들에게 욕먹어! 빨리 지리산으로 가야 돼요. 계속 갈 수 없어! 이리로!

그리스도인이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도덕적이며 윤리적이며 착해야 한다, 더욱 더 성숙(成熟)한 면모(面貌)를 보여주어야 한다. 좋아요. 노력하자고요. 이왕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추구하는 것! 예수 믿는 우리가 더 열심히 해보자니까요. 그런데 진짜 그렇게 해놓고, 그게 여러분의 자랑이 안 될 때, 그게 여러분의 복()이 되는 거지, 그거 해서 여러분이 여러분을 기특하게 여기면, 그거 독()이 된다는 걸 절대 잊지 마세요. 그래서 하느님이 쫓아내라그런 거요. 그 기특한 시도를!

 

루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자로와 부자 이야기가 나오죠? 나자로란 이름 자체가 엘리 에제르’,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은 자예요. 하느님의 도움을 받았는데, 왜 거지예요? 그건 바리새인에게 준 비유(比喩)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에요? ‘, 난 저 세리, 창녀(娼女)와 같지 않게, 이렇게 깨끗하게 살아서, 하느님, 참 저 괜찮죠? 이렇게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바리새인이었죠? 거기에다 던진 거예요. 하느님의 도움을, 능력을, 복을 받은 자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거지처럼,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자로 드러난다는 거예요. 그리로 끌려간다는 거예요.

그게 지향성(指向性)이에요. 종기를 개가 핥는데도 개를 쫓을 힘도 없어! 그런데 부자는, 하느님과 관계(關係)없는 자는, 이 세상에서, 정말 번드르르하게 잘 살아요. 이 거지 나자로는 자기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무슨 성숙은 개뿔? 개도 못 쫓는데 무슨 성숙과 변화를 추구해요?

그런데 이 부자는, 자기 집 앞에, 이 냄새 나는 거지가 구걸하는데, 놔두었어요. 어떤 부자가 그걸 놔둬요? 심지어 이름도 알아. 여러분, 동냥은 많이 주셨겠지만, 그 사람들 이름 물어본 적 있어요? 이 부자는 이름도 알아! 이게 바리새인이에요. 착하게, 율법을 갖고 자기들을 높이려고 하는 바리새인! 그런데 이들은 반드시, 그들과 내가 다르다는 구렁을 만들게 되어 있어요. 이걸 차이라고 하고, 그 차이(差異)를 통해서, 내가 만족(滿足)과 포만감(飽滿感)을 느낀다 말예요. ‘난 참 괜찮네이렇게!

그걸 하느님이 독사의 새끼라 그랬단 말이에요. 그 구렁이, 이 세상에서 나의 열심과 노력으로 만들어낸 그 것이, 어떤 다른 사람을 외모로 판단(判斷)하게 되고, 거기서 구렁이 생기면, 이 구렁이, 끝까지 영원(永遠) 속으로 가면,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을 가르는 구렁이 된다, 뜻이에요. 이것이 율법주의를 박살내는 비유(比喩)란 말이에요.

 

보세요. 성경을 다 뒤집어서 거꾸로 읽고 있잖아요? 착한 일 해야, 그렇게 부자로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다가, 그냥 죽으니까 지옥 가지. 거지에게 좀 나눠졌어야지!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 반대의 이야기라니까요.

이 역사 속에서는 율법주의가, 은혜의 성도들을 구별(久別)하고 핍박(逼迫)해요. 당연해요. ? 아닌 자, 죄인 중에 괴수, 없음! 이렇게 성도는 드러나기 때문에, 예수 믿고 그게 뭐냐? 핍박받아요. 그런데 그 핍박에서 벗어날 수도 없어요. ? 그렇게 사는 애굽에서 뽑아내기 때문에, 응전(應戰)도 못해, 보편, 포괄적(包括的) 아담들이 다 가고 있는 길에서, 뽑아내서 반대 길로 가게 하는 게 은혜니까! 그러니 이 세상에서 살맛나겠습니까?

진짜 살맛나세요? 구원 받아서 기뻐요? 행복해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인생과 접촉점을 만드는 그 순간, 몇 초! 행복하고 소망으로 들뜰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의 눈은, 곧 세상으로 곤두박질치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슬픈 거예요. 우울한 거예요. 외로운 거예요. 그러나 그 때마다, 하느님이 또 그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그 소망으로 살아 있게 만드는 거지, 뭐 그렇게 대단히 좋아서 펄떡 펄떡 뛰면서! 이렇게 살 게 안 놔두세요.

아니, 죽어가는 내 형제자매들이, 좀비처럼, 엉뚱한 걸 복음이라 믿고 살고 있는데, ‘아 나만 아니면 돼이게 기뻐해야 돼요? 이게 인간입니까? 이걸 성도라 그래요? 그런데 뭐가 기뻐요? 공항장애 안 걸린 것들은 다 가짜야! 그러니까! 우울하고 외로워야지! (하하하하)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고, 하느님이 13년 동안 안 나타났어요. ‘아 힘 남았네! 지금 내려가면 안 되겠구나.’ 기다린 거예요. 13! 완전히 마른 장작이 될 때까지.( 삐쳐서 안 나타난 게 아니라,) 이제 비아그라도 안 돼. 완전히 끝이야. 그 때 나타난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비웃은 거예요. 자기는 알거든요. 안 되는 거.

그런데 하느님이 오셔서, 이제 와서, 내가 힘 조금 남았을 때 하나 만들었더니, 그건 버리라 그러고, 이제 와서 나에게 자식을 준다니까, 웃은 거예요. 아브라함이! 사라는 원래 안 됐어요. 경수가 끊어졌으니 사라도 웃었어요. 그래야 너희들이 그 상황(狀況)이라는 거! 그렇게 죽은 흙이라는 걸 알아야, 거기서 진짜 생명(生命)이 잉태(孕胎)된다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 13년 안 나타난 거예요. 화나서 안 나타난 게 아니라.

이게 여러분의 인생이에요. 계속 해 보게 만드신다니까요. 그래놓고 그거 인정 안 해 줘요.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그러다가 결국 나중에는, ‘어 나 이거, 죽을 때 다 됐는데, 난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하다 꼴까닥 죽었어요. 죽은 시체(屍體),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죠? 그래서 하나님이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해요. 시편 126편에서.

 

죽을 때를 기다리는 거예요. 하느님이! 그러다가 꼴까닥 죽었더니, 이제 부활(復活)의 복이 뭔지 내가 한 보여 줄까? 그러고 확 부어 줬을 때, ‘그래 이렇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느님이 주는 이게 복이구나알고 천국 가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은 계속 죽는 거예요. 이 역사 속에서!

하느님이 나타나시더니, 뭐라 그러느냐 하면? ‘할례 행하라!’ 할례가 뭐냐면, 생식기 끝을 자르는 거예요. 그건, 생식(生殖) 능력 제로로 만들겠다는 뜻이에요. 죽은 자로 만든다는 뜻이에요. 그것이요! 그건, 아브라함이 지금 그런 상태가 됐다는 거예요. 그 상태가 되어야, 예수의 할례가 이해가 가는 거예요. 예수가 쪼개져서, 네가 하느님나라가 됐다는 걸 알려면, 네가 할례 받은 자, 생식기(生殖器)가 끊어진 자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생식능력 제로인 자가 되어야 되는 거요. 그래야 은혜가 이해가 가는 거요.

 

그래서 거기서, 할례가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할례는, 한 마디로 고자(鼓子)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뭔가를 생산해 낼 수 없는 자라는 걸 알아가는 걸, 역사라 그러고, 그걸 할례 받은 인생이라 그래요. 그런데 그게 복 받은 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에서 출발한다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할례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모든 걸 다 상실한, 죽은 자임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 지금 복 받은 인생을 사는 거, 맞아요. 제가 개런티(guarantee)해 드릴게요. 빨리 하느님나라가 왔으면 좋겠어, 진짜! 엉뚱한 소리 하는 놈들이 하도 욕을 많이 해서, 나는 걔네들이 그 앞에서, 어떤 표정(表情)으로 지옥으로 가는지, 꼭 보고 말거요.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쪼개져야 함에도, 우리가 구원에 이른 건, 예수가 쪼개졌기 때문이에요.

 

(이사야 53:8) 8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예수가 끊어졌죠? 예수가 몸으로 할례를 받은 거예요.)

 

(다니엘 9:25-26) 25 너는 똑똑히 알아라. 너희가 돌아 가 예루살렘을 재건하리라는 말씀이 계신 때부터 기름부어 세운 영도자가 오기까지는 칠 주간이 흐를 것이다. 그 뒤에 육십 이 주간 어려운 시대가 계속되겠지만, 그 동안에 성을 쌓고 재건하게 될 것이다. 26 이렇게 육십 이 주간이 지난 다음, 기름부어 세운 이가 재판도 받지 않고 암살당하며, 도읍과 성소는 한 장군이 이끄는 침략군에게 헐릴 것이다. 전쟁으로 끝장이 나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종말이 홍수처럼 닥쳐 올 것이다. (예수가 할례 받는 거요. 쪼개진 거예요. 십자가란 말이에요.)

 

(즈가랴 13:7) 7 칼아, 일어나 나의 일을 돕는다고 하는 목자를 쳐라. 만군의 야훼가 하는 말이다. 나의 목자를 쳐서 양떼를 흩뜨려라. 나 또한 손을 돌려 흩어지는 가련한 것들을 치리라.

 

여러분의 고추 끝이 잘리는 게 아니라, 모가지가 잘린 거예요. 칼에 의해서, 그게 할례란 말예요. 그걸 알아먹는 게, 이 율법의 종이 된, 이 역사의 역할이란 말예요. 목적이란 말예요.

우리는 계속해서 그렇게,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처럼, 율법주의(律法主義), 인본주의(人本主義)로 빠져서, 우리의 가치(價値)와 영광(榮光)을 챙기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할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분명히 알게 돼요. 그것이 죄라는 걸. 그 안에 성령(聖靈)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審判)이 무엇인지, 성령이 가르치신다고 하는 거예요. 제발 좀 알아들으세요.

바로 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제 예수가 오시는데, 그 예수도 똑같이, 생식능력 제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오시는 거예요. 성령으로 잉태(孕胎)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성령으로 잉태되는, 교회를 품어 안으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다 은혜로 된다는 걸, 보여주는 거란 말이에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 할례의 현실을 똑똑히 배우고 가면 되는 거예요.

남편 다섯이나 있었던 그 창녀(娼女)와 방불(彷佛)한 사마리아 여자가, 말씀인 예수를 만나고, 고백한 게 그가 내가 과거에 한 일을 다 알고 있더라!’ 이 한 마디 했어요. 복 받은 성도가 예수를 제대로 만나면, 그 고백을 하는 거예요. ‘내가 죄인 중에 죄인! 사망의 몸을 가진 더러운 자가 맞습니다.’란 그 고백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날 사랑한다네요.’ 그 고백을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복을 받아서, 이 아브라함의 인생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거! 그래서 우리가 그 아브라함처럼 마누라 두 번 팔아먹고, 수시로 애굽으로 도망가는 자로 폭로(暴露)되는, 이게 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가 그러는 거예요.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음(福音)을 전하셨는데, 그 복음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딴 사람에게까지 흘러간다.’고 이야기 하는 거요. 그건 전도(傳道)하란 말이 아녜요.

 

어디서부터 뜯어고쳐야 될 지? 이거 도대체가! 그 자체가 전도하라는 말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인생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예수의 인생인 십자가가 분명히 나타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당황(唐惶)하지 말란 말예요. 그리고는 그렇게 폭로 당했을 때, 내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얘기하세요. 인정해 버리세요. 그렇다고 딴 사람들에게 일부러 찾아다니며 막 얘기하고 그러지 말고요. 사람들이란 게 일관성(一貫性)이 없어서, 그걸로 또 흠을 잡아서 나중에, 여러분을 어떻게 공격할지도 몰라요. 그래서 은혜 받았다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저는요, 옛날에 이랬는데요 ~’

아담은 에덴동산이 생겨나기 전에, 이미 묵시(黙示) 속에서 완료(完了), 하느님의 백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역사 속에서 그의 역할(役割), 죽은 이었기 때문에, ‘아담이라고 지은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는 거예요. 그리고 죽은 임을 드러내고, 진짜 두 번째 아담! 그 분은 진짜 하느님이 비워내서 완전히 없어진 아담이었잖아요? 죽기까지 순종(順從)한 아담! 그 아담에 의지(依支)하여, 하늘나라 가면 되는 거요. 여러분의 인생이 하느님이 함께 하신 인생이었고 복이 주어졌잖아요? 상이 주어졌다고. 그러면 하느님이 상급(賞給)이라 그랬으니까, 여러분 안에 들어와 계시단 말이에요.

 

왜 우리가 이렇게 마귀 새끼 같은 사람으로 살죠? 자주 살잖아요? 가끔도 아니고! 하느님이 역사 속에서, 성령의 스위치를 뽑았다, 꽂았다, 계속하시면서,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은혜가 없으면, 너희들이 얼마나 무력한 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선풍기 코드를 뽑아버리면, 선풍기가 안 움직여요. 코드가 꽂히면, 선풍기가 돌아가요. 이 인간들은, 선악과 따먹고 내려왔기 때문에, 선풍기가 돌아가면, 제 힘으로 돌아가는지 알아요. 그래서 , 봐라. 내가 오늘 오백 바퀴 돌았다. 천 바퀴 돌았다.’ 자랑한다고요. 그걸 가지고! 그런데 하느님이 쑥 빼버려, 나는 이 능력이 나에게 사유(私有)되어서 내 능력이 되어 돌아가는 줄 알았어요. 이게 변화산 아래에서 믿음 없음의 사건이에요.

여러분이 몇 바퀴 돌아갔는지는, 하느님이 절대로 카운트하지 않아요.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자아실현(自我實現), 자아성숙(自我成熟), 이런 거를 추구(追求)하고 실현해 내는 게 아니라, 그 자아가, 죽은 자라는 걸 배우고 가셔야 돼요. 자아가 뭐예요? 스스로 자()! 나 아()! 나 아()자 어떻게 쓰죠? 손수() 변에 창 과().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손에 창 잡고 있는 게, 자아(自我)거든요. 그런데 이걸 실현(實現)을 하면 어떻게 돼요? 이걸 성숙시키면, 어떻게 돼요? 이게 죽음이며, 죄란 말입니다. 이 창을 놓고 십자가 붙들어야 성도인 거예요. 그래서 자기부인(自己否認)이란 말이 나온 거예요. 성경에! 그게 성도의 삶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영생에 관심을 두고 사셔야 돼요. 여러분의 여생(餘生)에 관심 두시면 안 돼요. 그런데 우리는 이 영생(永生)에 관심이 없고, 은퇴(隱退) 뒤의 우리의 여생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걸 준비하느라고 영생을 놓치는 거죠. 하느님을 배우세요. 여러분의 인생과 역사를 통하여, 하늘의 묵시(黙示)를 읽어내야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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