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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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옳은 말 자체가 싫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7 조회수429 추천수1 반대(0) 신고
                   옳은 말 자체가 싫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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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자이므로 당연히 '아침기도'로 하루 생활을 시작한다. 가족들의 일어나는 시간이 각기 다르므로, 아침기도를 온 가족이 함께 하지는 못한다. 아침기도는 각자 하기로 했다. 나는 아파트 창가에서 밝아오는 새 날을 보며 기도하는 날도 있고, 이온수기를 틀어서 알칼리수가 가늘게 나오도록 해놓은 상태로 물을 받으며 기도하는 날도 있고, 음식물 쓰레기와 분리수거 쓰레기들을 아파트 쓰레기통에 내다 버리는 일을 하면서 기도를 하기도 한다.

'아침기도' 다음에는 '삼종기도'를 하고, '수호천사께 바치는 기도'와 '수호성인께 바치는 기도'를 한다. 때로는 아침미사에 참례하러 성당에 가면서, 즉 운전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 또 아내와 조카아이 규빈이를 학교에 태워다 줄 때는 아내와 함께 '레지오 마리에' 단원들이 매일 의무적으로 바쳐야 하는 '까떼나' 기도와 레지오 마리에 창설자인 프랭크 더프의 시복(諡福)을 위한 청원 기도를 한다.

아침기도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봉헌 기도'를 한다. 아침에 컴퓨터 앞에 앉아 성호를 긋고 봉헌 기도를 하는 것은, 저 청년 시절 원고지에 육필로 글을 쓰던 때부터 비롯된 일이다. 원고지를 앞에 놓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 성호를 긋고 봉헌 기도를 할 때마다 스스로 느끼던 내 마음의 뜨겁고도 정갈한 상태는, 나이 먹어 컴퓨터로 글을 쓰는 오늘에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컴퓨터가 켜지면 맨 먼저 하는 일은, 어제의 내 생활을 기록하는 일이다. 나는 컴퓨터를 상용화한 2000년부터는 컴퓨터로 '생활일기'를 쓰고 있는데, 생활일기를 쓰는 것은 '성찰의 거울'을 만드는 일이다. 일년 후에 가서 일년 전의 내 삶을 돌아보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망각'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망각이 때로는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올곧은 정신을 유지하면서 노추(老醜)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생활일기 다음에는 어제 작업해 놓은 '매일미사' 내용을 복사하여 내 홈페이지 '공동체' 주막의 '매일미사' 방에 올려놓고, '가톨릭 굿 뉴스'로 가서 내일 치 '매일미사'를 복사하여 내 한글문서 방에 붙여놓고 찬찬히 읽어보며 잔손질을 한다. 나는 아직 '한글97'로 윈도우 작업을 하므로(그래서 중간 제목들은 복사되지 않으므로), 중간 제목들을 일일이 쳐 넣고, 부호들에도 손을 대곤 한다.

내가 내일 치 '매일미사'를 하루 전에 미리 내 한글문서 방에 가져와 작업하는 것은, 내일이 무슨 축일일까, 내일의 축일 내용을 하루 전에 알기 위해서다. 대축일들과 유명한 축일에 대해서는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매일미사'를 내 컴퓨터에 담는 작업을 몇 년째 되풀이하고 있으면서도, 보통 축일들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매일미사'를 하루 전에 숙독하면서 축일 내용을 미리 알려는 것은, 지인들의 영명축일을 하루 전에 알아놓았다가 당일에 메일이나 전화로 축하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또 성당에서 만나는 형제 자매들께 잊지 않고 영명축일 축하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루 전에 숙독한 미사 내용을 기억하면서 미사를 지내는 각별한 기쁨이다. 독서와 복음도 두 번 듣는 셈이고, 사제의 경문 봉송에도 두 번 참여하는 셈이고, 묵상도 더욱 깊이 되새기는 셈이다. 컴퓨터 모니터에서 전날 본 내용들을 성당에서 귀로 듣거나 '매일미사' 책의 활자로 다시 보는 맛은 정말 각별하다.

<2>
 
 

▲ 용산미사 / 용산참사 현장에서 미사를 거행하는 천주교 사제들  
ⓒ 지요하  용산미사


매일미사 작업을 하면서 한숨을 쉬는 경우도 많다. 독서와 복음들을 숙독하노라면 깊은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안에 점철된 의인들의 수난사를 보노라면, 의로운 일에는 왜 이런 고통들이 따르는가? 의인들이 당하는 고통은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라는 무의미한 의문에 가슴이 저리기도 하는 것이다.

며칠 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5일)'의 독서와 복음을 숙독하면서도 가슴 저리는 현상을 경험해야 했다. 제1독서는 구약성경 역사서 역대기 하권의 한 사건을 전해준다. 우상을 섬기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돌아오게 하려고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신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사제의 이들 즈카리야의 말에 앙심을 품고 음모를 꾸며 그에게 돌을 던져 죽인다.

즈카리야는 죽으면서 이런 말을 한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결국 현실에서 의인의 끝은 고통스러운 죽음일 뿐이다. 그 고통과 죽음을 현실이 아닌 곳에서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따름이다. 하여 현실은 그대로일 뿐이다.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께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을 들려준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그 희망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말씀 중에 '환난'이라는 말도 등장한다. '환난도 자랑으로 여긴다'는 말씀이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낸다"는 말씀은 그대로 환난이 전제된 말씀이다.

마태오 복음은 더욱 참혹한 상황을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중략)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결국 현실에서의 승리가 최종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참혹한 상황 속에서 싸우고 견딘 이는 그것의 대가로 구원을 받겠지만, 그 의인을 만들어낸 현실 상황은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수 있다.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수 있는 현실 상황 속에서도, 참혹한 곤경 속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말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올곧게 유지하며 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 자체가 구원을 받는 조건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구원을 위해 현실 속에서 많은 이들의 미움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말씀이다.

지금은 칼이나 제도로 종교를 탄압하고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유형 무형의 수많은 현상들이 하느님을 능멸하고 믿는 이들의 마음을 강제한다. 갖가지 우상들이 하느님 시늉을 하기도 한다. 이념의 우상도 있고, 지역감정의 우상도 있고, 왜곡과 오해가 빚어내는 우상들도 있다. 마음으로는 그 우상을 숭배하면서 입으로는 하느님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늘도 현실 속에서 수난을 당하시는 성직자들을 본다. 천주교의 사제들은 육신을 버린 이들이다. 사제들의 수단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고, 로만 칼라는 '독신 정결'을 상징한다. 그들은 가정도 없고, 혈육들과도 자주 만나지 않는다. 온 생애를 하느님과 신자들을 위해 투신하는 삶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본받으려 한다. 현실 속의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삶은 현실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는 혼자 산에서 기도하고 단식을 하면서도, 늘 현실 세상의 한복판에 있었다. 불의한 세상 권력에 맞서 싸우는 방식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실행했다.

많은 사제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다. 희생과 헌신, 불행한 이웃들의 고통을 온몸으로 껴안으려는 자세에서, 불의한 세상 권력에 맞서 싸우는 모습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실체를 확인한다.

그들에게 현실적인 욕망은 없다. 관직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부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본받으려는 뜻일 뿐이고, 어떤 곤경과 오해와 비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힘든 상황들을 감수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뿐이다.

그런 사제들에게는 두 갈래의 '적'들이 있다. 하나는 어두운 상황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불의한 세상 권력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자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이다. 고뇌하고 땀 흘리는 현장 속 사제들의 체취를 한 번도 맡아보지도 않은 채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비난하는지, 왜 기도라는 이름으로 저주까지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세상에는 옳은 일과 옳은 말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잘 모르는 데서, 또는 오해를 하는 데서 미움을 갖는 수도 있지만, 뻔히 옳은 일이고 옳은 말인 것을 알면서도, 그 옳음 자체가 왠지 싫거나, 그냥 관성적으로 미워지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위에 소개한 구약성경 역사서 역대기 하권의 한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사제의 아들 즈카리야의 말이 옳은 말임을 알면서도 옳은 말이 역겨워 앙심을 품고 음모를 꾸며 그를 죽이는 사람들이다.

그런 유형의 인간들(특히 신자들)을 보노라면 측은한 마음 가운데서 절망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신앙 속에 과연 그리스도의 말씀과 모습이 존재하고 있는지, 과연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3>

지난 4일(토) 오후에 안양에서 사시는 누님과 안산에서 사는 누이동생이 또 친정엘 왔다. 어머니의 병환 때문이다. 어머니는 모르시지만, 어머니의 여생이 6개월 정도라는 서울성모병원 응급실의 여의사에게서 들은 말, 어머니의 폐와 갑상선에 종양이 생겼다는(2001년 수술 후 치료가 종결된 대장암으로부터 전이된 암세포라는) 진단은 온 가족에게 '비상 국면' 상태를 안겨 주었다.

5일(주일) 낮에 가족 모두 성묘를 했다. 근처 선산을 찾아 조상님들을 뵙고, 근래에 돌아가신 숙부와 숙모, 그리고 사촌 형님의 묘에는 술과 음식을 드렸다. 기도를 하면서 나로 인해 묘들의 비석에 그분들의 세례명이 새겨진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읍내의 한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노모께서 가장 즐기시는 추어탕과 미꾸리튀김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고, 음식을 잘 드시는 어머니를 보며 위안과 희망을 얻기도 했다.

식사를 하면서 고 노무현 대통령과 현 이명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 내 승합차 뒤 유리에 붙은 '조중동은 사죄하라'는 부착물과 수구족벌언론들의 폐해에 관한 이야기, 이순신 장군 이야기, '4대강 살리기(죽이기) 사업'에 관한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누님과 누이동생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의 깨어 있는 의식과 적극적인 선거 참여가 필요함을 말했고, 현재 홀아비로 살고 있는 오십대 초입의 동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도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은 소수였다. 언제 어디에서나 의로운 사람들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불의한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고, 세상일에 무관심하거나 바르게 판단할 수 없는 우민대중 때문에 세상을 온전히 변화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끝으로 이런 말을 했다.

"그럼에도 깨어 있는 사람들은 의로움을 위해 싸우며 살아야 한다. 그것은 순교정신이기도 하다. 의로움을 위해 고뇌하고 힘들게 싸우며 살았던 그 값은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갔을 때 하느님께서 값을 쳐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가져갈 것을 위해서도 의롭게 살아야 하고, 의로움을 위해 고뇌하고 싸우며 살아야 한다. 그것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불의한 사람들, 세상의 권력 편에 서서 의로운 이들을 음해하는 사람들, 옳은 일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이런 내 말을 최종 결론으로 삼고, 우리 가족은 대화와 토론이 있는 즐거운 식사자리를 마치며 '식사 후 기도'를 했다. 즐거운 식사 후에도 '세상 떠난 모든 이들의 영혼이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평화의 안식을 얻도록', 세상 떠난 이들을 배려하는 천주교의 기도에 다시 한번 감사를 느끼며….


09.07.07 14:30 ㅣ최종 업데이트 09.07.07 14:30
출처 : 옳은 말 자체가 싫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 오마이뉴스
ⓒ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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