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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1027 -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27 조회수1,714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7
10 27 () 가해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Friday of the Twenty-ninth Week in Ordinary Time

로마서
7,18-25 / 에페소서 4,1-6
루카복음 12,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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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7,18-25

형제 여러분, 18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Reading 1


Rom 7:18-25a 


Brothers and sisters:
I know that good does not dwell in me, that is, in my flesh.
The willing is ready at hand, but doing the good is not.
For I do not do the good I want, but I do the evil I do not want.
Now if I do what I do not want, it is no longer I who do it, but sin that dwells in me.
So, then, I discover the principle that when I want to do right, evil is at hand.
For I take delight in the law of God, in my inner self, but I see in my members another principle at war with the law of my mind, taking me captive to the law of sin that dwells in my members.
Miserable one that I am!
Who will deliver me from this mortal body?
Thanks be to God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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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4,1-6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Reading 1


EPH 4:1-6

Brothers and sisters:
I, a prisoner for the Lord, urge you to live in a manner worthy of the call you have received, with all humility and gentleness, with patience, bearing with one another through love, striving to preserve the unity of the spirit through the bond of peace;  one Body and one Spirit, as you were also called to the one hope of your call;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over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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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복음 12,54-59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Gospel


Lk 12:54-59

Jesus said to the crowds, "When you see a cloud rising in the west you say immediately that it is going to rain
?and so it does; and when you notice that the wind is blowing from the south you say that it is going to be hot?and so it is.
You hypocrites! You know how to interpret the appearance of the earth and the sky; why do you not know how to interpret the present time? Why do you not judge for yourselves what is right? If you are to go with your opponent before a magistrate, make an effort to settle the matter on the way; otherwise your opponent will turn you over to the judge, and the judge hand you over to the constable, and the constable throw you into prison. I say to you, you will not be released until you have paid the last pe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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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10 27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등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세상을 파악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눈이나 귀를 통해 얻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그 이면에 더 깊은 배경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 나아가 때로는 눈이나 귀가 우리를 속일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가 온전히 우리의 선입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착각하고 있음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눈앞에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징표로 마치 불가사의한 기적과 같은 일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기적 가운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일상적인 삶이 정상적으로 자리를 잡을 때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고 존중 받는 세상, 저마다 열심히 일하면서 자신의 인격과 소명을 완성시킬 수 있는 세상, 사랑으로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 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소박한 세상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잘 읽어 내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점점 발전해 가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려면, 우리 세대가 가진 과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표징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의 오늘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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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 10 21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이 요청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감동하며 바친 첫 응답을 잃어 가는 우리를 채근하는 말씀입니다. 감동은 언제나 생의 밑바닥에서 일어납니다. 내 속된 마음이 진실함과 만나 정화될 때, 내 가볍고 천박한 생각이 혜안을 열어 주는 깊은 가르침을 만날 때, 감추고 싶던 내 상처와 죄로부터 치유와 용서를 받을 때, 나의 내적 갈증을 채워 주는 우물 같은 사랑을 만났을 때 우리는 감동합니다.
하지만 이런 첫 감동도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면 식상해지기 마련입니다. 내적 감각이나 예민했던 감수성도 사라지고, 상대를 향했던 존경심과 신뢰심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주님 안에서 수인(囚人)”이라고 표현합니다.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자유를 잃은 것이지만, 주님의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에 흠뻑 빠져 있어 세상의 어떤 구속과 억압에도 자유롭다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처음 체험하고, 교회에 첫발을 내디디며 세례를 받고,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부르심에 응답했던 첫 순간들은, 첫 마음의 순수함이었고, 주님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을 것이란 희망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어떤가요?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는 예수님의 훈계는, 부르심을 받을 때 가졌던 내 영의 맑음을 잃어 가면서 세상일에는 더 밝아지지만, 내 영혼을 옭아매고 어둡게 하는 시대의 징표들을 읽어 내지 못하는 우리의 우둔함을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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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0 23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 기념일)


갈릴래아 호숫가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어부들이었기에 날씨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또한 오랜 경험으로 기후의 변화를 어렵지 않게 가려낼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씨와 일기는 예측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자신의 구원과 관련된 “이 시대”의 징조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엉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이 시대’는 물론 예수님 시대, 곧 하느님에게서 파견을 받으신 당신께서 사람들 사이에 사시면서 말씀과 행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시던 시기를 뜻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새 시대’를 알아보지 못하고 ‘옛 시대’의 기준과 잣대를 예수님께 들이대면서, 그분께서 율법과 계명을 어기고 잘못 가르치는 등 당신이 틀렸다고 따졌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하고 그들을 질책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 이후 모든 시대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기들 시대의 징조를 파악하려고 애써 왔고, 그렇게 이천 년이 지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새 시대의 징표를 알아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새 기준을 찾았을까요?
자신의 나약함을 절감하면서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독백과 그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두 시대가 교차함을 봅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의로움을 얻으려고 애쓰다가 비참함에 좌절하는 것이 옛 시대의 인간이라면, 은총으로 우리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생활을 하는 것은 새 시대의 인간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구체적으로 감사의 생활은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는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따르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시대의 징조를 읽을 줄 아는 새 시대 사람은 아직 시간이 있는 동안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는 현명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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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 1024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주교 기념일)


우리는 행복을 위한 ‘삶의 지혜’를 열심히 추구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인생살이에서 참으로 중요하지만 흔히 빠질 수 있는 ‘인식의 함정’이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솔깃한 ‘처방’만 찾다가 정작 ‘지혜’의 가장 깊은 측면을 놓친 채 겉으로 드러나는 고정 관념에 더 심하게 매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이탈리아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고대 ‘삶의 지혜’의 가장 뛰어난 종합이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풀이하면서, 사람들이 자주 간과하는 진정한 ‘삶의 지혜’를 위한 두 가지 요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저 이론적인 지식이거나 자신의 ‘인격’과 무관한 차원의 능숙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우리가 의지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를 통해 실현하는 ‘실천적인 앎’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인간이 이 세상에서 행하고 체험하는 도덕과 행복은 본디 불완전하며, 오직 하느님과의 최종적 만남에서만 ‘완전한 행복’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인간적 지혜’와 ‘인간의 행복’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그의 이러한 통찰과 함께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의 징조를 잘 알면서도 ‘시대’를 풀이할 줄 모르는 자들을 ‘위선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표현으로 지식은 있으되 삶의 지혜에는 무지한 자들을 딱하게 여기시는 한편, 교묘하게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외면하려는 그들 마음속의 유혹을 날카롭게 벗겨 내십니다. 그러시면서 ‘삶의 지혜’를 가진 이는 오히려 화해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라고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화해의 힘의 근원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있음을 언제나 말씀하고 계심을 잘 압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도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힘입어 일치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혜’는 어쩌면 너무나 단순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화해와 일치와 사랑을 ‘지금 여기서’ 실천하는 이, 주님의 은총이 인간적 불완전함을 채워 나간다는 것을 믿고 바라는 마음을 가진 이야말로 참으로 행복을 위한 지혜를 깨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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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10 25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다른 차가 뒤에서 들이받는 사고를 자주 당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왜 이렇게 운이 없는지, 또 자기 차를 들이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운전이 서툰지 늘 그들만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그의 운전 습관을 보면서, 운이 없거나 운전이 서툰 사람들을 자주 만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 운전할 때에 급하게 제동하는 습관이 있어서 뒤에서 따라오던 차들이 들이받는 사고가 자주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친구는 이렇게 충고하였습니다. “자네는 자신의 운전 습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네. 세 번이나 비슷한 사고를 당했는데도, 급제동의 습관은 여전하니 참으로 답답하네. 그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 똑같은 추돌 사고를 피하지 못할 것이네.
단순한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사고가 날 때마다 그 사고를 자신의 운전 습관을 고치라는 하나의 표징으로 알아들었다면, 더욱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 채 운이 없다거나 다른 운전자들을 탓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많은 불행한 일은 우리의 잘못된 습관과 행동을 고쳐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연 현상을 보고서 날씨를 예측하고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알면서, 왜 일상의 사건들을 보고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모르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모든 사건에는 모난 부분을 고쳐 나가라는 암시가 있는 법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그러한 데에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한편, 어리석은 사람은 오히려 불평과 불만만 쏟아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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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10 26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전에 본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빠삐용은 살인 누명을 쓰고 절해고도(絶海孤島)의 감옥에 갇힙니다. 그는 감옥에서 탈출하다가 붙잡힙니다. 하루는 그가 꿈속에서 판사를 만납니다. 그는 판사에게 “나는 무죄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하고 항변합니다. 판사는 그에게 “너는 살인죄로 기소된 것이 아니다. 네가 저지른 죄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흉악한 범죄다. 너는 네 인생을 낭비한 죄로 기소되었다.” 이 말을 들은 빠삐용은 유죄임을 인정하며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날씨가 어떠할지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여러 징표로 보여 주셨지만 군중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주님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의 멸망이 곧 닥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촉구하십니다.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길은 때가 더 늦기 전에 지금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조지 버나드 쇼는 생전에 자기 묘비에 새길 말을 정해 놓았습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답니다. “내 인생,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지.” 우리 역시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대며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물쭈물하며 인생을 낭비하다 보면 무덤에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인생살이에서 주님을 몰라보고 지내는 것만큼 후회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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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 1021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우리는 올해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그 여파로 몰려온 쓰나미(해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경험했습니다. 쓰나미에 따른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는 물론이고,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누출 사고로 지금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사고로 방사능에 오염된 지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고,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다 표면에 부는 폭풍우보다 바닥을 흔들어 놓는 쓰나미가 훨씬 더 무섭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도 표면에 이는 풍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삶의 뿌리를 흔드는 정신적 쓰나미입니다. 곧 왜곡된 우리 인간의 가치관입니다. 실제로 인간 사회가 겪는 대재앙 뒤에는 자연의 재해보다 인간의 탐욕, 곧 정신적 쓰나미가 숨어 있습니다.
대재앙을 몰고 온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이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1986)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협하는 크고 작은 원전 사고를 경험하고도 사람들은 현실의 이익과 편리를 내세워 끊임없이 핵 발전소 건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누군가 핵 발전소 건설은 “화장실 없는 집을 짓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어쩌면 지구의 수명만큼이나 영구적이라 할 수 있는 핵폐기물의 방사능 물질이 땅속 어딘가에 계속해서 쌓여 가는데도 아무런 문제의식도 저항감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서운 정신적 쓰나미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시대에 어디서 어떻게 이만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느냐고 되물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대안 없이 원자력을 반대한다면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느냐고 항의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동 장치 없는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누군가 제동을 걸지 않으면 후쿠시마 원전의 교훈처럼 결국 가까운 미래에 후손들이 그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게 됩니다. 우리가 죽음의 에너지를 반대할 때 지구 환경에 피해가 없는 청정 에너지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에 끊임없이 도전할 때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사회의 정신적 가치가 살아납니다.
이미 독일이 2022년까지 원자력을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유럽의 선진국들이 이러한 움직임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라는 오늘 복음 말씀을 우리 모두 깊이 새겨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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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022)
(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기념일)


유교 사상의 핵심 내용들 가운데 ‘시중’(時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주재하는 하늘의 때에 딱 들어맞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역』(周易)은 이 ‘시중’을 잘 실천할 수 있도록 참고 도서 역할을 하는 책입니다. 이 개념은 어느 것이 하늘의 뜻이고 아닌지를 잘 식별하여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전통적인 유가의 가르침이지요.
굳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들 가운데에서도 더러는 운명 철학관에 가서 이른바 ‘사주팔자’나 ‘운수’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현실은 답답하고 미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철학관을 찾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약해 흔들리거나, 주님의 뜻에 충실하지 못하고 요행을 바라거나, 희망을 주님께 두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호통을 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무엇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옳은지 아닌지를 식별할 줄 알면, 운수니 사주팔자니 하는 따위를 찾을 필요가 없을 겁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주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이 시대에 참된 신앙인의 삶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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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1023)
(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 기념일)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내일의 날씨는 예측하면서 ‘내일의 삶’은 왜 덮어 두느냐는 말씀입니다. 재물이 앞날을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곁에는 돈과 물질이 넘쳐 나고 있지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현실을 풀이할 열쇠는 언제나 사랑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애정 결핍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능의 탐닉에 쉽게 빠져듭니다. 물질로 영혼을 달래려는 것이지요. 하지만 답이 아닙니다. 갈증만 심해질 뿐입니다. ‘사랑하는 삶’이 정상적인 길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화해에서 시작됩니다.
싸운 적도 없는데 무슨 화해를 하란 말인가?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다가서는 행위’가 화해입니다. 먼저 웃고, 먼저 말을 걸고, 먼저 손을 내미는 행동입니다. 늘 만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뜻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소송 중인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재판관이신 주님께로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보이는 것만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삶 속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깨달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사랑도 깨달음입니다. 아픔 없이 어떻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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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10 24)
(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주교 기념일)


세상일은 잘 내다봅니다. 세상이 주는 사인 역시 잘 읽습니다. 경제적 상황이나 미래의 예측 또한 정확합니다. 그런데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가족과의 관계도 서툽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요? 자기중심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머리만 믿고 남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늦기 전에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과의 화해입니다. 가족과의 화해요 이웃과의 화해입니다. 돈과 재물이 많다고 노년이 자동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하고 똑똑하면 가만있어도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더 늦기 전에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노년과의 화해입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꾸짖고 계십니다. 시대의 요구는 언제나 화해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건 화해는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말에 공감하는 여유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들의 말을 먼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웃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하면 주님의 말씀도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시대의 ‘아웃사이더’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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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10 26)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질책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참사랑의 결핍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능의 탐닉에 빠지고, 또한 그것으로 메마른 영혼을 달래려 합니다. 사랑이 목마른 탓입니다. 그럼에도 원인을 알아채지 못하는 가운데 갈증은 더욱 심해지고, 불안과 허무감이 더해집니다. 젊은이들이 스피드와 폭력과 성적 놀이에 빠지는 주된 이유입니다.
치유의 지름길은 사랑하는 삶에 있습니다. 그 삶은 화해에서 시작됩니다. 싸운 적도 없는데 무슨 화해를 하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화해는 마음을 열고 다가서는 것을 뜻합니다. 먼저 인사하고, 먼저 웃고, 먼저 걱정해 주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화해의 시작입니다. 자주 만나는 사람과 가까운 이웃에게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만 따라가려 합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깨달음을 통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길에는 십자가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사랑 역시 십자가입니다. 아픔 없이 어떻게 시대의 뜻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시대의 징표를 읽는 것은 또 하나의 깨달음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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