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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절뚝거리며 사는 이들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08 조회수575 추천수11 반대(0) 신고
 
 

절뚝거리며 사는 이들 - 윤경재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5,3-10)

 

 

 교회 전례력에 따라 매년 연중 제10주간부터 제21주간까지 평일 복음독서로는 마태오 복음서를 읽습니다. 5,1절에서 25,30절까지 읽습니다. 오늘이 그 첫날로 마태오 복음서 5,3-12절은 교회의 헌장 같은 역할을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마음자세와 실천적 삶의 태도를 가리켜 보입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진복팔단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극하고 참된 복을 얻는 여덟 가지 단서라는 뜻입니다.

  이 진복팔단을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더욱 답답해지고 무력감을 느낍니다. 도저히 이처럼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막막함과 죄의식이 솟구칩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살면 손해 볼 것만 같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것 같아 두렵기만 합니다. 가난하고, 슬퍼하며, 온유하며, 주리고 목마른 것이 어떻게 행복을 줄 것인지 믿기지 않습니다.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며 즐겨 박해받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어찌 살라는 말인지요. 배워 알면서 모르는 채 외면하면서 살기엔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선종한 장영희 마리아님의 글에서 “남보다 느리게 걷기에 슬라이드 필름처럼 세상이 보이고, 세세한 아름다움을 더 많이 볼 수 있다.”라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어려서 앓은 소아마비 탓에 양 다리와 오른손이 불편하였지만, 누구에게도 크게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삶을 열심히 그러나 행복하게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하며 사는 모습을 통해 고난에 빠진 많은 사람을 위로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고난의 삶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여러 개 나옵니다. 창세기 32장에 하느님과 씨름하는 야곱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은 형 에사우의 쌍둥이 동생으로 성질 급한 형의 성격을 이용하여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은 적이 있습니다. 또 아버지 이사악이 늙어 눈이 어두울 때 아버지를 속이고 에사오에게 갈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야곱은 그 이름 뜻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속이는 자’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형 에사우의 복수를 피하고 동족 여인과 혼인하려고 하란 땅으로 도망쳤습니다. 하란에서 그는 형을 속여 먹은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는 체험을 했습니다. 외숙인 라반에게 속아 20년간 머슴처럼 살았습니다. 라반 밑에 더 머물렀다가는 그의 질투에 생명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올 결심을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형 에사우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 탓에 모든 것들이 의심스럽게만 보였습니다. 그는 먼저 형의 마음을 풀려고 자기가 얻은 재산을 나누어 형에게 선물로 바칩니다.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해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다가 야뽁 건널목에서 어느 사람을 만나 밤새 씨름을 하였습니다. 야곱은 씨름의 상처로 엉덩이뼈(히브리어;예렉)를 다치게 됩니다. 그 후 그는 절뚝거리며 걷게 되었습니다. 엉덩이뼈는 히브리어에서 남성 생식능력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야곱이 사람 삶의 길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옳은지 갈등하며 하느님께 여쭈어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이 지나온 삶을 반성하며 하느님께 축복을 빌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절뚝거리며 사는 삶이 올바른 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는 뜻입니다. 돌이켜보면 야곱은 여태껏 자기 멋대로 삶을 살아 왔습니다. 그는 거기서 인간적 꾀를 도모하여 살아온 삶이 과연 행복한 것이었는지 반성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씨름하듯 묵상하며 어떤 새로운 지평에 눈을 뜬 것입니다. 남들이 바보 병신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절뚝거리는 모습이 어쩌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지름길이라는 자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생명을 건진 곳 프니엘이라 불렀습니다.

  그야말로 성경에는 속고 속이는 인간의 군상을 가감 없이 그립니다. 이런 사건이 벌어진 데는 어머니 레베카가 동생 야곱을 더 사랑한 데서 비롯하였습니다. 형이 동생에게 절 하리라는 신탁을 액면 그대로 믿었고 자신의 의지로 그 신탁을 성사시키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야곱이 절하게 되었습니다.“야곱 자신은 그들보다 앞장서 가면서, 형에게 다가갈 때까지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였다.”(창33,3)라고 적혀 있습니다. 만약 레베카가 그 신탁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들지 않았고 에사우와 야곱을 똑같이 사랑했으며 정의로운 삶을 보였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즉시 벌하지 않으시고 기다렸습니다. 야곱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야곱은 긴 세월 빙 둘러 살아왔다가 겨우 제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형에게 절하면서 삶의 질서가 제대로 잡힌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저자는 탈출기 1,5절에서 그 ‘야곱의 엉덩이뼈’를 다시 거론합니다. “야곱의 몸에서 난 이들은 모두 일흔 명이었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원문은 야곱의 엉덩이뼈‘예렉-야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야곱이 절뚝거리며 살아온 삶에서 자손이 번성했다는 뜻입니다. 남들은 생식을 담당한 엉덩이 부분이 능력을 잃어버린 줄로만 착각하였겠지만, 바로 그 손상 입은 엉덩이뼈에서 한 민족을 일구는 기적이 나왔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고 나서 살아온 삶의 모습은 아마도 예전에 약삭빠른 모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영적 가난으로 대표되는 진복팔단의 모습을 지키면서 절뚝거리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하신 삶의 모습은 어쩌면 외견상 바보스럽고 모자란 삶일 것입니다. 진복팔단의 길을 한시라도 놓칠세라 전전긍긍하며 살 때 아무것도 모르는 외교인들은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이야말로 하느님께 축복받는 길이며 참 행복을 누리는 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게 보이는 삶이야말로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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