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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1029 - 가해 연중 제30주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작성자김진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29 조회수1,581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7
10 29 () 가해 연중 제30주일 복음 묵상

Thirtieth Sunday in Ordinary Time

탈출기 22,20-26
테살로니카 1 1,5-10
마태오복음 22,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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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 탈출기 22,20-2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0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21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22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 23 그러면 나는 분노를 터뜨려 칼로 너희를 죽이겠다. 그러면 너희 아내들은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24
너희가 나의 백성에게, 너희 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25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26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Reading 1


Ex 22:20-26 

Thus says the LORD:
"You shall not molest or oppress an alien, for you were once aliens yourselves in the land of Egypt. You shall not wrong any widow or orphan. If ever you wrong them and they cry out to me, I will surely hear their cry. My wrath will flare up, and I will kill you with the sword; then your own wives will be widows, and your children orphans. If you lend money to one of your poor neighbors among my people, you shall not act like an extortioner toward him by demanding interest from him. If you take your neighbor's cloak as a pledge, you shall return it to him before sunset; for this cloak of his is the only covering he has for his body. What else has he to sleep in? If he cries out to me, I will hear him; for I am compassion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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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 1,5-10

형제 여러분, 5 우리가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떻게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6 또한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모든 신자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8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시작하여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울려 퍼졌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곳곳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9
사실 그곳 사람들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10 그리고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곧 닥쳐오는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Reading 2


1 Thes 1:5c-10

Brothers and sisters:
You know what sort of people we were among you for your sake.
And you became imitators of us and of the Lord, receiving the word in great affliction, with joy from the Holy Spirit, so that you became a model for all the believers in Macedonia and in Achaia.
For from you the word of the Lord has sounded forth not only in Macedonia and in Achaia, but in every place your faith in God has gone forth, so that we have no need to say anything. 
For they themselves openly declare about us what sort of reception we had among you, and how you turned to God from idols to serve the living and true God and to await his Son from heaven, whom he raised from the dead, Jesus, who delivers us from the coming wr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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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마태오복음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Gospel


Mt 22:34-40

When the Pharisees heard that Jesus had silenced the Sadducees, they gathered together, and one of them, a scholar of the law tested him by asking, "Teacher, which commandment in the law is the greatest?"
He said to him,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 whole law and the prophets depend on these two command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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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10 29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탈출기 22,20-26
테살로니카 1 1,5-10
마태오복음 22,34-40


그리스도인들이 초세기부터 지향한 완덕의 길은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어느 정도 세상에서 이탈하는 것을 뜻합니다. 도를 터득하려고 속세를 떠난다는 것은 거의 모든 종교가 가진 공통적인 방법론이고, 가톨릭 교회의 초기 수도자들이 택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을 거쳐, 진정한 완덕의 길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세상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하느님에 대한 기도와 사랑이 전제되지 않으면 허울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아름답게 꾸며지는 ‘내면의 삶’도 하느님과 만남을 통해 그분께서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신 우리 이웃들과 만남으로써 이루어지고 완성됩니다. 그래서 내면의 삶은 바로 우리 외적인 인간관계들의 원천이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려고, 그리고 하느님만을 생각하려고, 잠시 이웃들과 떨어져 지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리듬이 있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기도와 활동의 리듬 안에서 늘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을 만나는 삶입니다. 기도는 활동을 지향하고, 활동은 기도로 우리의 삶을 초대합니다. 이 두 가지의 조화 안에서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거룩해지며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두 가지 계명은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완벽한 계명이며, 가장 아름다운 조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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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1030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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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025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예레미야서 31,7-9
히브리서 5,1-6
마르코복음 10,46-52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의 절규는 단순한 부르짖음이 아니라 그의 신앙 고백이요 기도입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께 소리치며 부르짖는 그를 주위 사람들은 시끄러우니 잠자코 있으라고 합니다. 거지 주제에 운명이려니 하고, 자신의 처지를 그가 온순하게 받아들이기를 강요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고통을 통해 가르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을 그가 믿고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지혜로운 처사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소리를 질러 댄다고 생각합니다.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성전에서 경건하게 정성껏 올리는 자기들의 제사만 아름답고 고고한 기도라고 생각하면서, 길거리에서 소리치는 그의 부르짖음은 소음 공해에 불과할 뿐,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오히려 방해만 된다고 꾸짖으면서 소리치지 말라고 저지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 자신 안에서도 이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면서 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요. 마음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부르짖음이 있지만 무엇인가가 내리누르면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조용히 기도만 하고, 눈길을 저 높은 곳에 고정시켜, 눈먼 거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번거롭게 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말라고 스스로 타이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부르짖는 눈먼 거지에게서 당신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확인하십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간청은 이 비참한 내가 눈을 뜰 수 있다는 믿음,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으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구원을 받은 것은 그에게 잠잠히 있으라고 꾸짖던 이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막고 그분께 소리를 지르던 눈먼 거지였습니다.
용기와 소신을 갖고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린 바르티매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도 적극적으로 주님께 나아가 우리의 나약함을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이 어떻게 들리시는지요? 그리고 그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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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1026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탈출기 22,20-26
테살로니카 1 1,5-10
마태오복음 22,34-40


가을이 깊어 갑니다. 신학교 시절, 어느 가을의 아름다운 ‘공동체의 밤’이 생각났습니다. 그날 지도 신부님은 우리에게 사제직은 외로우면서도 고귀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미셀 콰스트 신부의 기도 시집 『삶의 모든 것』이라는 책에서 주일 저녁 모든 일과를 마치며 느끼는 본당 신부의 소회를 표현한 기도 한 편을 읽어 주셨습니다.
“주님, 오늘 밤, 저는 혼자입니다./ 성당 안의 소음도 차츰 사라지고/ 모두들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도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 혼자서.// 주님, 저를 보십시오./ 저는 혼자입니다./ 침묵이 나를 숨 막히게 하고/ 고독이 나를 괴롭힙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남을 위해서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중략) 혼자라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 있으면서도 혼자라는 것/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고통과 죽음과 죄 앞에 혼자 서 있다는 것/ 주님, 정말 어렵습니다 …….
이 기도의 몇 대목을 읊조리면서, 우리 사제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주신 참된 사랑의 갈망을 따라가려는 모든 이를 위한 기도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을 위한 삶은 때로는 이해받지 못하고, 외로우며, 지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사랑을 혼자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귀한 길을 포기하여 외로움을 ‘잊는’ 어리석음 대신에, 그 길을 인내함으로써 사랑 안에서 벗을 ‘얻는’ 삶을 선택할 용기를 가집니다. 이 기도의 마지막 대목이 더욱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주님, 저 여기 있습니다. 제 몸도 제 마음도 제 영혼도, 다 여기 있습니다./ 저로 하여금 주님께로 향해 가는 길이 되게 하시고/ 아무것도 꺾일 것이 없는 길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저는 주님 앞에/ 혼자 있습니다./ 이 밤의 평화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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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1027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집회서 35,15-17.20-22
티모테오 2 4,6-8.16-18
루카복음 18,9-14


중국 춘추 시대 제나라의 유명한 재상 안영의 마부와 관련된 일화입니다.
이 마부는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길을 비키고 예를 표하는 모습에 마치 자신이 재상이나 된 듯이 착각하며 말을 몰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부의 아내는 그러한 남편의 모습이 영 못마땅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주인은 키가 여섯 자도 못 되는 분이지만 제나라의 정승이 되어 이름이 천하에 높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항상 스스로 몸을 낮추고 계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키가 팔 척이나 되지만 남의 마차나 끄는 마부이면서도 스스로 우쭐하여 거만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과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마부는 곧바로 아내에게 백배사죄하고 다시는 거만을 떨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마부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안 재상 안영이 그 까닭을 마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마부는 아내의 따끔한 충고에 따른 것이라 이야기하였고, 재상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큰 벼슬을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재상은, 아내의 말에 공감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마부의 품성을 보고 벼슬을 내렸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사람의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을 높이는 기도를 한 반면, 세리는 자신을 낮추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곧 바리사이는 자신의 눈으로만 자신을 바라보았기에 잘난 것만 생각났던 것이고, 세리는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기에 부족한 면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자신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들의 말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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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1028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예레미야서 31,7-9
히브리서 5,1-6
마르코복음 10,46-52


미국의 헬렌 켈러는 시각과 청각의 중증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녀는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장애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모든 감각 중에서도 시각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훌륭한 문필가이기도 한 그녀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 전,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마침 숲 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온 참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별것 없어.’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오랫동안 숲 속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헬렌 켈러는 단 사흘만이라도 앞을 볼 수 있다면 그 시간을 셋으로 나누어 이런 것들을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날에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 준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오후에는 오래도록 숲을 산책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렵니다. 저녁이 되어 찬란하고 아름다운 저녁노을까지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그날 밤 나는 하루 동안의 기억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
가진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의 소중함을 알고, 병에 걸린 다음에야 건강의 중요함을 깨닫는 법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시각 장애인만큼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요? 눈먼 거지는 얼마나 세상을 보고 싶어 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눈먼 거지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그 소경은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의지해야 살 수 있는 무능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시어 그를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고쳐 주신 것입니다. 눈이 멀쩡한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축복에 대해 얼마나 감사드리며 살고 있는지요? 그리고 눈먼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과연 어느 정도 헤아리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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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1023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 기념일)

탈출기 22,20-26
테살로니카 1 1,5-10
마태오복음 22,34-40


어떤 신자분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어떻게 다른지 질문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이 둘은 따로 구분할 수 없는 한 몸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도 이것을 따로 떼어 하느님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을 떼어 놓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요? 생각이나 말로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한다고 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하느님이 보여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고 했지요. 이 말씀은 우리 안에 덕지덕지 붙은 죄의 불순물들을 없애야 하느님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깨끗한 마음일 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윤리적 질서를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맑고 깨끗하게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말로 이러한 질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 삶의 표현 방법입니다.
우리 삶에서 윤리적 기초가 무너져 있으면 아무리 교회에 봉사하고 이웃을 사랑해도 내적으로 평화와 기쁨을 잃게 됩니다. 반대로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살아도 이웃을 위한 봉사와 사랑이 없으면 삶의 의미와 보람이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짐을 지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누리는 인생의 참된 행복에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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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0 24)
(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주교 기념일)

집회서 35,15-17.20-22
티모테오 2 4,6-8.16-18
루카복음 18,9-14


기도는 주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대화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출 때만 가능합니다. 대화가 가능하다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압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을 비울 때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기도하는 두 사람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 가운데 바리사이는 자신을 낮출 줄 모르고 거만하게 자신의 공적을 나열합니다. 이러면 주님과 대화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겠지요? 대화는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솔직한 삶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리사이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을 높이는 데 급급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사실이었기에, 긴말이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와 은총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도하는 두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의 태도와 닮아 있습니까? 주님께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결코 의로운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을 생각해 주지 않으면서, 주님께는 자신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이 곧 이웃 사랑이고, 이웃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라고 하는 이치가 바로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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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10 25)

예레미야서 31,7-9
히브리서 5,1-6
마르코복음 10,46-52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외칩니다. 사람들이 말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언제 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박했습니다.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질병도 낫게 하시는 분이란 소문입니다. 그의 애절함은 마침내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그를 불러오너라.” 주님의 말씀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러고는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눈을 뜬 바르티매오는 평생 ‘그 순간’을 간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감동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의 감동에 우리 역시 동참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에게 내려졌던 은총이 얼마나 위대하고 따뜻한 것이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애절한 무엇이 없는지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그 무엇’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풀리지 않는 ‘그 어떤 일’입니다. 바르티매오의 심정이 되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우리는 눈먼 이가 아니지만 영적으로 눈멀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면 누구나 영적으로 눈먼 이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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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10 26)

탈출기 22,20-26
테살로니카 1 1,5-10
마태오복음 22,34-40


한 아가씨가 두 남자와 선을 봅니다. 모두 조건이 좋은 남자입니다. 첫 남자와 데이트를 했습니다. 마을 뒷산을 돌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남자가 멈춰 서며 말합니다. “잠깐, 뱀이 있는 것 같군요.” “어머나 어디에요?” 아가씨는 놀라 소리칩니다. “저기 나무 밑을 보셔요. , 죽은 것 같군요. 너무 놀라실 것 없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표정은 굳어집니다.
다음 날 두 번째 남자와 산책을 합니다. 일부러 그녀는 어제 그 나무 옆을 지나갑니다. 그러자 남자가 말합니다. “그냥 똑바로 가시지요.” “왜요? 뭐가 있는가요?” 아가씨는 퉁명스럽게 묻습니다.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대신 저기 들꽃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돌아오는 길에 여자는 남자에게 묻습니다, 나무 밑에 죽은 뱀이 있었는데 왜 못 보게 했냐고. 남자가 대답합니다. “안 좋은 것은 한 사람만 보는 것으로 족하지요.” 아가씨는 마음속으로 그를 선택합니다.
사람에겐 운명적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면 그만큼 인생은 행복해집니다. 누구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라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실천의 첫걸음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입니다. 좋은 정보와 좋은 말을 전하다 보면 자동적으로 사랑의 관계는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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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10 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로마는 이 이스라엘 민족을 제압하고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세무 조사를 통하여 반발 세력의 기를 꺾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에 동원된 이들이 세리였습니다. 그 때문에 유다인들은 세리들을 죄인 중의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리 가운데 한 사람이 성전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의 기도는 이 한마디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하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변명이 아닌 부끄러움의 고백이었습니다.
한편 바리사이는 세리를 업신여기며 자신의 행위를 늘어놓는 것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한 셈입니다. 그의 기도에는 애절함이 없습니다. 그는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을 의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은 다른 사람을 생각해 주지 않으면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어린이의 신앙입니다. 바리사이는 자만과 우월감이라는 벽 속에 갇혀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리사이처럼 기도를 바치지는 않는지 곰곰이 돌아봅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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