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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리읽는 복음/연중 제13주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27 조회수497 추천수3 반대(0) 신고

 

 

 

    ★[연중 제13주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성 베드로 와 성 바오로는 공동체를 위한 일치의 표지이며 구원의 표지입니다. 두 분은 로마시의 보호자이다. 베드로 성인은 어부였고 이름이 시몬 이였다. 네로 시대에 십자가에 머리를 밑으로 하고 거꾸로 순교 하였다. 바오로 성인은 제일의 선교 사도이며 가장 중요한 선교사로써 67년 로마에서 머리를 잘려 순교하였다. 성 베드로 와 성 바오로 는 각각 64년과 67년에 순교하였으며, 그들의 무덤은 바티칸과 로마 성밖 오스티아로 나가는 길가에 있다.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의 아들 시몬 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에게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사랑을 구걸하신다. 그것도 당신이 목숨을 바쳐서 사 랑했던 제자 베드로 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호소하신다. 이 말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 이제 나 좀 사랑할 수 있겠니? 나 좀 사랑해 줄래?" 라는 예수님의 하소연이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되게 하기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셨다. 결국 생명까지 바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또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간 베드로 에게 다시 한번 나타나셔서 하소연하 시는 것이다.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것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듣 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요한 의 아들 시몬 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 를 사랑하느냐?"라는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를 위해 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시고 더 이상 해 주실 것이 없는 상황에서 하신 질문이다. 결국 복음의 끝 부분에 던지신 이 질문은 우리 인간이 복음을 통해서 어떤 인간으로 변화되어야 하는가를 말씀하시는 대목이기도하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되어야 할 우리의 모습은 사랑하는 인간이 되는 데 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도달해야 할 우리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그 모습이 가장 하느님을 닮은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 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라고 말씀하셨던 우리의 미래상이기 때문 이다.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사랑하는 인간이 되지 못한다면 또 그런 모습으로 변화되어가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한마디로 신앙생활을 잘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설 때 주님이 나에게 물으시는 질문은 무엇일까?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 아니면 얼마나 출세했느 냐? 얼마나 배웠느냐? 얼마나 좋은 음식을 많이 먹고 좋은 옷을 입었느 냐? 이런 질문들일까? "요한 의 아들 시몬 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던지신 질문은 우리가 이세상의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에게 던지실 질문이다. 그럼 예수님이 물으시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사랑에는 세 가지 사랑이 있다고 했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적인 사랑이라고 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물으신 사랑하느냐? 라는 동사는 15절과 16절에서는 아가페적인 사랑이고 17절에서 사용한 동사는 필레이 동사 를 사용하셨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이라고 했다. 즉 헌신 하는 사랑, 관심을 갖는 사랑, 봉사하는 사랑, 책임감을 느끼는 사랑 이라고 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상대방이 사랑할 능력이 없으면 사랑할 수 있는 능 력을 갖게 만들어 주는 사랑이다. 사랑할 수 없는 이가 사랑할 수 있도 록 모든 뒷바라지를 해 주는 사랑이다. 즉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사랑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사랑이다. 예수님이 베드로 에게 베푸셨던 이와 같은 아가페적인 사랑을 우리는 그분의 흔적에서 볼 수 있다. 주님이 돌아가신 후 스승을 대신해서 복음을 선포해야할 수제자가 그 런 일은 하지 않고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하고 본래의 직업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동료들까지도 복음을 전하 는 일이 아니라 본래의 직업으로 돌아가도록 부추겼던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한테 불리 움을 받았던 그 소명에로 돌아 올 수 있도록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하시며 고기 잡고 있던 그들을 도와 주시는 모습과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왔을 때 단 한마디도 그들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오히려 배고픈 그들이 먹을 빵과 생선을 구워 놓고 기다리시는 모습이 모두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필리아라는 동사를 사용하신 것도 아가페적인 사랑을 못하면 적어도 필리아적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즉 내가 너를 위해서 생명까지 바쳤다면 너도 나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것이 너의 의무가 아니냐? 아가페적인 사랑을 못하면 적어도 필리아적인 사랑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그런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헌신적인 주님의 사랑을 받은 베드로는 오늘날 누구 인가? 예수님은 베드로 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 다 해주 셨다. 예수님은 베드로 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사랑해주셨다. 그렇다면 "요한 의 아들 시몬 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오늘 우리 각자에게 던지시는 질문 이다. 예수님이 던지신 질문은 일에 대한 질문도 아니고 책임에 대해 물으시 는 것도 아니고 다만 사랑에 대한 질문이셨다. "요한 의 아들 시몬 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일도 아니고 자리도 아닌 사랑일 뿐이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1코린 13, 8)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 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 에게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돌볼 양은 누구의 양인가? 베드로의 양이 아니다. 길에 버려진 양들이 아니다. 그 양들은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예수님의 양들이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예수님에 대한 그 사랑이 양들을 돌보는 것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베드로가 돌보아야 할 양들은 마치 예수님을 사랑한 것처럼 그렇게 헌신적으로 정말 마음으로 돌보아야 할 예수님의 양들 이다. 베드로는 양들을 사랑으로 돌봄으로써 스승을 배반했던 그 미안함을 보속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며 말로가 아닌 행동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 에게 당신 양들을 맡기기 전에 정말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몸소 체험케 하신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돌보아야 할 예수님의 양들을 바라 보는 눈빛이 다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돌보아야 할 예수님의 양들을 대하는 마음 자세부터 다르다. 표정이 다르고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 마더 데레사 를 보라. 자기 양들 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그 수녀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사랑 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가를 배울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돌보아야 할 예수님의 양들을 위해 헌신하는 하루가 되도 록 노력하자. ◇ -유광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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