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크레타 인 데움(라: Credo in Deum)!.......차동엽 신부님
작성자이은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14 조회수917 추천수4 반대(0) 신고

  


 

 

크레타 인 데움(라: Credo in Deum)! 나는 믿나이다, 하느님을!"......차동엽 신부님

 

건강식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계란을 살 때 꼭 유정란(有精卵)을 삽니다.
계란에는 유정란과 무정란이 있습니다.

암탉이 혼자 난 계란이 무정란이고
암탉과 수탉이 함께 만들어 낸 계란이 유정란입니다.

계란을 부화하거나 암탉이 품었다고 다 병아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유정란만 부화되어 병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무정란은 품고 있으면 오히려 썩어 버립니다.
겉보기에는 무정란이 유정란보다 더 클 수가 있지만
크기가 병아리의 부화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람입니다.


사람도 겉보기에는 다 똑같이 멀쩡한 사람입니다.
도리어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보다 더 똑똑하고
더 교양 있고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정란만이 병아리를 부화할 수 있듯이
마음속에 하느님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새 생명(生命)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분을 모시면 그분의 생명이 당신 안에서 잉태됩니다. 
믿는다는 것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터무니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두뇌로 생명을 조작할 수 있고 연장할 수 있게 된
이 첨단 과학의 시대에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바보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이들을 우리는 '거룩한 바보들'이라고도 말합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이 거룩한 바보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역사(役事)하신 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세상 사람들은 지성과 외모, 확신에 찬 태도 등을 존중하지만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계획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
오직 그분께 의지할 줄 밖에 모르는 단순한 사람들을 종종 사용하십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의 약삭빠른 계산법이 당장은 통하는 것 같아도
지나고 나면 부질없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믿음은 '역전(逆轉)의 법칙을  당신의 현실로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욥기 19,25)

이는 욥이 고통 속에서 외쳤던 말입니다.
이것이 욥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재산, 자녀, 가축들, 마침내는 자신의 몸뚱아리에까지 찾아온 '날벼락'을 보고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해 준답시고 가뜩이나 억울한 속만 더 뒤집어놨습니다.  

"그것은 필경 죗값임에 틀림이 없으니 하느님께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빌게나!" 
하고 욥을 죄인 취급했던 것입니다.  

욥은 아무리 뒤져 봐도 집히는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죄다 자신을 죄인으로 손가락질해도 
하느님만은 자신의 무죄함을 알고 계시며 
언젠가는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저렇게 소리쳤던 것입니다.

욥의 신앙 고백에는 욥의 몸부림이 실려 있습니다. 
조금만 머물러서 되새김해 보면, 
이 짧은 신앙 고백에 그의 현재와 미래가, 
그의 삶 전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크레타 인 데움(라: Credo in Deum)! 나는 믿나이다, 하느님을!"
사도신경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
(라: pattrem omnipotentem creatorem coeli et terae)"입니다. 

우리말에서는 이것이 뭉뚱그려저서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전능하신'이라는 수식어가 '천주'(=하느님)를 꾸미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믿는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믿나이다. 하느님 곧 전능하신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이라고 번역해야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즉 내가 믿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그분은 이러저러한 분이라고 
그분의 속성을 부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문대로 번역을 해 보면, 
문장 구조가 욥기의 신앙 고백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믿나이다,......을" 뿐만 아니라 
고백하는 내용도 거의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사나 묵주 기도때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우리의 삶과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고 건성으로 중얼거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욥의 신앙 고백에 욥의 삶의 무게가 실렸듯이, 
"나는 믿나이다, 하느님을"이라고 하는 우리의 신앙 고백에도 
우리의 삶의 무게가 실려야 합니다.

즉 내 삶의 온갖 물음, 회의, 실패, 절망 등에 대한 대답이요 대안이요 보루로서 
하느님이 고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까?"

이것이 이번 장의 중심 문제입니다. 


 

 

 

 

**    무지개 신부님 얼굴을  클릭...!!^^    **하시면

   [무지개다리]로 이어집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