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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 번에 한 명씩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13 조회수577 추천수5 반대(0) 신고
 
 
 

한 번에 한 명씩 - 윤경재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14,21-26)

 

  복음서에서 예수께 질문하는 장면이 여럿 나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대답은 직접 응답하시는 경우가 드뭅니다. 먼저 질문한 사람에게 되묻거나, 알쏭달쏭한 말씀으로 질문한 사람이 스스로 되돌아보게 하신 다음 은연중에 깨닫도록 유도하셨습니다. 또는 비유 말씀으로 넌지시 답을 주어 상대방이 깊이 생각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즉, 안목을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올려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즉응즉답을 피하신 이유는 질문한 사람을 곤란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며 논쟁으로 치닫는 것을 막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유다 타대오로 알려진 다른 유다의 질문에는 어쩐 일인지 외면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십니다. 되묻지도 비유로 이끄시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유다의 질문을 빼놓고 읽어도 앞뒤 문맥에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그의 질문은 무시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유다 타대오의 질문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지금 우리의 처지입니다. 유다 타대오의 질문은 그 현실성이 너무나 강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예수께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우리 대신 질문했다는 느낌입니다. 유다의 질문이 예수님의 앞선 말씀을 오해한 데서 나왔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실제적입니다. 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나타나셨고 지금까지도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사도10,40-41)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대목은 초기 공동체에서부터 이 문제에 관해 외교인들에게 수없이 질문 받았다는 간접 증언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수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심지어 종교 간의 갈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야 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문제로 벌어진 전쟁과 살인 행위에는 어느 종교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상대방을 이단으로 악마들의 집단으로 치부하여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한 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정의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인간의 과오는 쉽게 씻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왜?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 인류를 예수님 발아래 놓지 않으시는지 정말로 궁금합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지 왜 드러내지 않으시는지 안타깝기조차 합니다. 우리끼리 아무리 옳다고 주장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께서 어떤 뜻으로 유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셨는지 정말 묵상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게도 떠나지 않고 늘 머릿속에 맴도는 묵상거리였습니다.

  제 묵상이 오직 미루어 짐작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먼저 고백하면서 작은 소견이나마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매달릴 수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대답은 대단히 원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14,23-31절의 원론적 내용은 유다의 질문이 인간적 생각에 오염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점이 우리의 의문을 풀어가는 실마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칙은 세 부분입니다. ㄱ)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 ㄴ)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실 것이며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다. ㄷ)아버지와 내가 다시 찾아가 그 사람 안에서 거처하며 나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이 ㄱ,ㄴ,ㄷ 내용이 14,15절부터 14,24절까지 세 번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 사실을 가르치시고 되새겨 주실 것이라 보증하십니다. 그리고는 평화를 주십니다.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이미 들어 온 현재의 종말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내어 주십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식입니다.

  유다 타대오의 질문은 세상이 원하는 조건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발이 통하는 세상을 떠올렸습니다. 힘의 논리가 득세하는 세상을 염두에 두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보다는 종교적 성공을 우선하는 인간적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간적 욕심마저 버리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분이 종교적 성취에 매몰되어 하느님의 참뜻을 잊고 삽니다. 밤하늘에 빛나며 붉은 십자가 네온사인으로 표상되는 한국의 교회는 외적 성장에 치중하고 타인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더 성공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무작정 선교에 뛰어들다 보니 반대자와 냉담자를 양산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뜻을 잊어버립니다. 영향력과 힘을 길러야 더 성공한 것이라는 세상의 패러다임을 교회에도 적용하려고 애를 씁니다. 성공한 자가 더 행복하다는 논리를 주저 없이 펼칩니다. 남과 다른 사람들을 부정적 시각으로 봅니다. 불행한 삶이라고 속단합니다.

  서강대 영문과 교수로 며칠 전에 선종한 장영희 마리아님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소아마비로 1급 장애 판정을 받고 어려운 환경에도 박사학위를 따냈습니다. 근년에는 유방암과 척추암, 골암 등으로 세 차례나 입원하고 치료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희망과 기쁨과 유머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장애를 천형으로 표현한 기사를 무척 싫어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신의 삶에 축복도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그렇게 드러냈습니다. 그녀가 남긴 말들은 많은 사람에게 축복의 언어가 되고 있습니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남보다 느리게 걷기에 더 많이 볼 수 있다.” “'내 힘들다'를 거꾸로 하면 '다들 힘내'가 된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희망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그녀처럼 생각합니다. 그녀를 통해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14,28) 

 떠나감과 죽음이 더 기쁜 일이라는 이 말씀은 이제부터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떠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기에 오히려 기쁘게 사는 삶’을 자각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평화의 상태를 거절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에 매달리는 자는 자신이 참으로 변화하는 길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빠른 길임을 압니다.

  끝없이 밀려드는 가난한 이들과 병자와 죽어가는 이들 속에서 바쁘다고 외치는 봉사자들에게 그러면 더욱 기도와 묵상에 매달리라고 충고하셨던 마더 테레사의 해법을 떠올립니다. 또 ‘한 번에 한 명씩’이라는 마더 테레사의 좌우명은 유다 타대오가 되고픈 우리에게 해답을 알려주시는 주님의 목소리입니다. 그 한 사람이 소우주이며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눈에는 모두가 소중한 한 마리 양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어렴풋하나마 주님의 뜻을 읽을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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