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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 바오로의 고통과‘한(恨)’의 영성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05 조회수577 추천수9 반대(0) 신고

 

사도 바오로의 고통과‘한(恨)’의 영성



   고통은 인생의 신비이다. 수많은 사상과 종교가 고통의 문제와 씨름했어도 세상에는 여전히 고통을 대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 고통을 회피하는 길과 고통을 받아들이는 길.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고통은 단순히 육체적인 병과 상처로 얻은 물리적인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를 둘러싼 불안과 갈등, 죄와 약점, 삶의 무의미와 죽음의 체험까지도 포함된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고통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 안에서 내면화한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 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 하렵니다”(12, 7-9).


   사도 바오로가 말한‘내 몸에 가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고질병이거나 말라리아, 간질, 절뚝거림 일수도 있고, 복음 선포 가운데 당한 매질의 후유증, 혹은 이방인 선교 과정에서 나타난 우울증과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의심, 적대자나 반대자의 끊임없는 괴롭힘 등의 정신적인 혹은 영적인 투쟁을 꼽기도 한다.

 

   바오로의 표현에 따르면 그가 뛰어난 설교가가 아니었기 때문에(2코린 10,10; 사도 20, 9-12 참조) 겪은 부족한 말주변이나 수사학 기술의 부족으로 겪는 고통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른 한 편으로 바오로는 자신이 사도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겪은 수많은 고난들의 목록을 열거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다. 그가 겪은 옥살이, 매질과채찍질, 돌질을 당하고, 전도 여행 중에 가는 곳마다 겪은다양한 형태의 위험들과 고통들을 솔직하게 표현 한다(2코린 11,23-28; 12,10; 1코린 4,11-13 참조).

 

   이유가 어쨌든 바오로는 가시와 같은 자신의 내면적 약점과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로부터 받은 고통들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오히려 이것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여겼다.


   바오로가 이런 자신의 고통을 자랑스럽게 여긴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나 피하고 싶었던 육체적 고통과 내적 갈등의 여정을 굳이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받은 소명이‘그리스도 예수님’(로마 3,24; 1코린 1,1; 4,15)으로부터 왔다는 확신과 이 확신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열정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약점과 고통이 하느님이 이루시는 놀라운 업적을 드러내는 도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인생의 역설적 신비, 즉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기희생이 가져온 새로운 삶과 부활로 드러난 하느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필리 2,8-11; 2코린13,4 참조). 사도 바오로의 드라마틱한 회심의 체험은(사도9,4; 22,7; 26,14) 그가 남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당당한 유대교 랍비의 문하에서(사도 22,3) 충실한 교육을 받은 열정적인 바리사이(필리 3,5-6)로서 가졌던 인간적인 자부심이 아니라,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1코린 4,13) 피할 수 없었던 사도로서의 소명 속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바라보게 해준 힘이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고통의 내면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국인은 누구나 삶의 여정에서 겪게 된 고통의 체험들을‘한(恨)’으로 내면화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한(恨)이란‘가슴에 맺힌 응어리진 애환들’을 말한다. 우리가 겪는 한의 체험은 체념과 원한, 좌절과 낙담의 부정적인 체험인 듯 보이지만, 사실 우리 내면을 움직이는 역동적인에너지와도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 특히 가난과 폭력, 미움과 따돌림, 오해와 편견으로 세상의 바닥을 체험한 적지 않은 이들이 여전히 세상을 등지지 않고 살아가는 힘은 한국인이 갖고 있는 한의 체험이 지닌 역동성이다. 가난과 폭력의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뛰어난 인내와 현실 긍정의 힘을 지닌 이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만난다. 누가 봐도 동정할 수 있는 현실의 왜곡과 모순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모순이 자신이 짊어질 십자가라고 고백하는 미련하고 때로 엉뚱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우리는 십자가를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고, 몸에 간직하거나 주변에 걸어두지만, 바오로처럼“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라는 외침에는 고개를 돌린다.



   솔직히 우리 세상은 내 약점과 고통보다는 내 장점, 능력, 성공을 자랑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바보로 사는 것도 싫지만, 하느님 앞에서 바보가 되는 것도 주저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가슴 속에 맺힌‘한’을 복수와 원한으로 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오늘을 인내하고 내일을 희망하게 해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고백한다. ‘한’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조화로운 세상의 결핍으로 생긴 것이라면, 이 한이 다시금 일치와 조화,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데 겪어야할 신앙인의 조건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도 바오로가 전도 여행 중에 겪었던 숱한 고통과 갈등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예수님의‘한’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동시

에 바오로는 예수님의‘한’이“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해(로마 8,26)”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우리에게 선사 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피조물이 겪는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생명과 평화를 희망할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임을 강조한다(로마 8,18-30 참조).


   우리 시대는 여전히 모순과 왜곡, 피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한’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한’은 창조된 세상의 죄와 무질서를 한탄하시면서도 세상의 구원을 위해 외아들을 파견하시는 하느님의‘통애(痛愛)’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고통은 결코 홀로 버림받은 체험이 아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신 고통 받으시는 하느님의 가슴 아픈 사랑에 뿌리를 박고 있는 희망의 단초이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자신을 본받는 사람”(1코린 4,16; 11,1; 필리 3,17)이되라고 말했다. 그가 겪은 고통의 체험이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바로 고통과 죽음이 나만의 것도,‘ 나’아닌‘너’만의 것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드러난 우리 모두의 부활한 삶의 희망이 담긴‘신비’(1코린 15, 51)라고 고백하기 때문이 아닐까?



-손용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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