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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 나’의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길 - 4.1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15 조회수788 추천수5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4.15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사도3,1-10 루카24,13-35

                                          
 
 
 
 
  ‘참 나’의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길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오늘날도 여전히 호소력 있는 말마디입니다.
 
문명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야만인(野蠻人)은 늘어나고
참 사람 야인(野人)은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날로 왜소해져가는 사람들이요
개천에서 용 낳는 것도 기대하기 힘든 시대입니다.
 
한나 아렌트라는 학자는
오늘을 일컬어 ‘비속성의 시대’라 하며,
‘악의 비속성(banality of evil)’이란 말도 쓰곤 합니다.
 
전통적인 악(evil)은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아렌트가 보는 20세기의 악은 경멸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천재성도 용기도 보여주지 않고
그저 천박한 탐욕에 몰려 저질러지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비속성은 근대문명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조업 현장에서는 명장이 사라졌고 싸움터에서는 용사가 없어졌으며,
20세기의 천재는 기능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온통 기능적인 존재로 전락한 현대판 노예들로 가득한 세상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비속성의 시대에 참 사람 되어 참 나로 살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해 저는 답을 찾았습니다.
 
바로 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처럼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태생 불구자의 대조가 의미심장합니다.
 
가진 것 없어 가난하기로 하면
베드로 사도 역시 가난한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성전 앞 아름다운 문 앞에서 자선을 청하는
태생 불구자와 오십보백보입니다.
 
그러나 내적부요로 하면 베드로보다 부자는 없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성전 앞에 구걸하는 앉은뱅이 태생 불구자는
상처나 열등감으로 삶의 의미와 의욕을 잃고
하루하루 연명하듯이 타성에 젖어
무기력한 안주의 삶을 살아가는 정신적 불구자들을 상징합니다.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어있는 삶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정신적 불구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누구나의 내면 깊이에는
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갈망이 숨겨져 있는 법입니다.
 
일상의 노예에서 벗어나 제 발로 서서 걸으며
자유인의 삶을 살고 싶은 갈망입니다.
 
베드로처럼 이런 이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해주는 게
진정 복음 선포입니다.
 
태생 불구자의 갈망을 꿰뚫어 본 베드로의 접근이 참 기민합니다.
 
진정한 대화의 소통은 눈 맞춤 후에 가능하기에
태생 불구자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자,
“우리를 보시오.” 말하며 우선 눈부터 맞춘 후 적절한 처방을 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세상에 예수그리스도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유다인의 속담에 고기를 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는 말도 있듯이
정작 이웃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스스로 살 길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중심이요 영혼이십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만이
진정 내적 부자요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에게도 물질적 재산보다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물려주는 이들이 진정 지혜로운 부모들입니다.
 
이래야 노년에 자식 문제로 고생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 비로소 참 나의 자유인이 된 태생 불구자,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되고 구원받은
정신적 불구자를 상징합니다.
 
정작 힘들고 무서운 것은 육신의 불구보다
상처나 열등감으로 인한 마음의 불구입니다.
 
다음의 치유, 구원 받은 태생 불구자의 모습은
영육으로 자유로워진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는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성전에 들어갔다는 표현이 의미심장합니다.
 
태생 불구자는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 있었기에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치유 받자 즉시 성전에 들어 가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베드로 쪽입니까, 혹은 태생 불구자 쪽입니까?

늘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할 때
베드로처럼 활력 넘치는 자유인의 삶이지만
냉담으로 마음 무뎌지면 다시 정신적 불구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하여 매일 미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의 이야기,
그대로 미사 중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시는 성찬 전례 중
두 제자는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본 후
즉시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분께서 길에서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바로 성경을 풀이해주시는 말씀의 전례 중에
주님께서 함께 해 주셨음을 뒤 늦게 깨닫는 두 제자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 중,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통한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 체험이
우리의 영육을 치유하여
베드로 사도처럼, 구원 받은 태생 불구자처럼 자유롭게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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