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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43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4-30 조회수381 추천수5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44-5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이번 주간은 영원한 생명과 생명의 빵에 대하여 계속하여 묵상하고 있습니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며, 영은 영원한 생명을 주지만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을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군중을 상대로 다른 표현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영과 육에 관하여는 우리 동양사상은 혼과 백으로 풀이하고 있으나 실제로 영이 있고 혼이 있는지는 어느 누구도 증명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 집착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은 영원한 진리를 실천하는 올바른 정신으로 묵상하고 있으며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양식은 예수님이 알려주신 말씀과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든 모습입니다. 말씀을 지금 실천해야 하듯이 말씀을 양식으로 삼는 영 또한 현세적 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세적 관점에서의 영을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내세적 말씀은 주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셨으므로 복음을 이해시키는 방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은 죽음과는 반대의 개념이므로 우리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지금의 모든 종교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늘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과 불안의 정점이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원시종교인 샤머니즘이 생겨났으며 이는 우리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 등에 따른 것이므로 자연스러운것이며, 이를 미신으로 치부한다면 도덕과 구별되는 종교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부터 다시 재고해 봐야 합니다.

두려움의 대상에게는 잘 봐달다고 섬기는 방법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 섬김이 지금의 종교 예식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산 주변에 사는 사람은 산이 진노하는 것이 가장 무서웠기 때문에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바다가 진노하는 것이 가장 무서웠기 때문에 해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두려움은 하늘이 진노하여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이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제사를 지내려면 각기 여러 곳에서 분산되어 생활하던 사람들이 제사 때에는 한 곳에 모여야 했습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한 곳에 모였다하여 오늘의 社會라는 단어가 생겨났으며 "社'의 원래 의미는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며 모인다는 뜻을 가진 ‘會’의 의미는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종교의 역할이 다양하게 발전해 가고 있지만 모든 종교의 밑바탕에는 이런 제사가 있으며 우리의 미사도 바로 제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우리가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하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祭政一致 사회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의 권한이 가장 막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제사장의 지시를 따라야 제사를 지낼 수 있으므로 제사장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권위를 내 세우기 위해서도 신의 음성을,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알려줘야 하고, 이렇게 알려줘야 무지한 민중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으며 자신은 그들 위에 군림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지능이 발전하면서 이런 형태의 제사 행위와 이에 따른 율법은 당연히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에 저항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유대민족은 많은 고난을 받았기에 이런 제사에 대한 믿음이 더 강했던 민족이었고 제사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민족 동질성을 더 중시하였습니다. 인권이 탄압받아야 인권운동가가 생겨나듯이 이런 원시적인 종교적믿음이 강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예수님과 같은 인류의 위대한 성인이 태어나신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하신 말씀으로 민중들을 깨우쳐주시고 그 대신에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민중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이 영원하시고 진리가 영원하듯이 진리와 내가 하나 되는 것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민중들에게 알려주시며 복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들 즉, 그들의 제사와 율법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을 해 본 사람들을 오늘 복음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진리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만이 진리를 생각한다.'는 의미인 듯합니다. 이렇듯 우리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진리의 삶을 살겠다는 사람만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또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이렇듯 진리와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을 뜻하고 있으며 민중들이 혹시나 이 말씀을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으로 부터 직접 배운 사람으로 오해할 우려가 있으므로 다시 부연하여 설명하신 말씀이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만이 아버지의 뜻을 모두 깨달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메시아를 사칭하고 다니는 것에 속지 마라는 당부입니다. 당시는 메시아를 사칭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공관복음서에서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루카 21,8)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말씀을 증명해 주신 분은 그 누구도 아니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또한 진리의 삶을 알려주시고 이를 실천하신 인류의 모든 성인들 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가에 대하여는 그것은 각자의 입장과 생각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가 생각했던 그 목적에 우리 신앙이 충분히 도움을 주고 있다면 그 분에게는 우리 신앙이 가장 적합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에 우리 신앙이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실망하고 냉담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각자가 선택할 문제이므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에는 그 누구도 이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종교생활을 하는 이유가 각자 다르고 교회는 중세처럼 영원히 군림할 수 없으므로 우리 교회는 과거의 향수를 빨리 잊어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전달하고 이를 실천하는 길만이 우리 교회도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이므로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기억하여 이를 실천하여 진리의 삶을 사는데 있습니다. 이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교회도 예수님의 가르침인 진리와 진실을 바르게 알려주고 자비를 앞장서 실천하여야 예수님이 알려주신 '영원한 생명'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끝으로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오늘도 무지한 민중들에게 복음을 알려주셨습니다.
민중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희망을 위안 삼으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오히려 두려움을 더 조장하여
민중들을 더 힘들게 하며 민중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였습니다.
이를 알려주시다가 성자께서는 깜깜한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자의 이름으로 일부에서는 이를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부디,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잘못된 이 모든 것을 바르게 잡아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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