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천 명을 먹이시다(마르코8,1-38)/박민화님의 성경묵상
작성자장기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06 조회수645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9년 3월 6일 금요일 마르코복음8장
 
마르코복음 7장에서
전통과 율법에 매어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이방여인인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을 고치고
귀먹은 반 벙어리를 치유하시면서
전통과 율법에 매어 있는 것이 귀신들린 사람이며, 귀먹은 반벙어리라고
예화를 들어서 치유해 주시면서 영적인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7장에서 영적으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다시
8장에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보고도 육적인 양식으로만 먹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표징인 기적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하기 때문에
 
 
벳사이다 소경을 치료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보고
"너희들이 생명의 양식을 먹고도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영적 소경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소경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에
"영원한 생명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알고,
그 분이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셨는데
안다는 말은 헬라 말로'기노스코'인데 '깨닫다'라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을 때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완성과 천국의 완성을 위하여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예고를 하시는데
 
우리들이 영안이 열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볼 수 있고
성경말씀을 하느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을 때
맨 마지막에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써 죽음에서 승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구원완성이고 천국완성이고 끝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느님 말씀을
한 장 한 장 읽고 그 말씀의 뜻을 깨달아 살아가게 되면,
성경말씀을 문자로 보지 않고 하느님 말씀으로 생명의 양식으로
느끼고 깨닫게 되는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믿음도 점점 자라 예수님을 메시아로 말로만 고백하지 말고
가슴으로 마음으로 심령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천국을 묵상합시다.
 
 
사천 명을 먹이시다(마르 8,1~38; 마태 15,32-39)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을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육안으로 보면 기적을 통하여 많은 빵을 만들어 주시는 것이지만,
영안으로 볼 때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양식인 말씀으로
우리들의 영혼을 자라게 하는 기적을 보여주시는 것인데
 
우리들 성장에는 자연적인 성장이 있고 초자연적인 성장이 있는데
자연적인 성장은 빵과 물고기를 먹음으로써
아기들이 자라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이고,
초 자연적인 성장은
생명의 말씀인 성경 말씀으로 심령을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기적의 뜻을 알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 말씀으로 믿고 받아 들여
영적인 초 자연적인 성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을 때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 영혼은 매일매일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빵 일곱개와 물고기 몇마리를 예수님께 바쳤을때 사천명이나
먹일수 있는 기적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으며 오늘날에도
내 안에 있는 귀중한것을 주님께 봉헌했을때 기적이 일어날수
있는 것입니다.
 
육의 양식은 빵이지만 영의 양식은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레마 말씀이기 때문에 먹는 빵에만 치우치지 말고 생명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우리 영혼에 양식이 되어 영적인
성장을 할수 있도록 매일 성경 말씀 읽고 묵상합시다.
 
1 그 무렵에 다시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3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8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9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10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다(마태 16,1-4)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이나 먹이는 기적을 보여 주셨는데도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느님으로 알아 보지 못하고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사람은,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벳사이다 소경을 치유하시면서
너희들이 육안으로는 잘 보지만 영적으로는 소경들이라는 것입니다.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마태 16,5-12)
 
14 그런데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설명:
바리사이들의 누룩이란 말은,
바리사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설명: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율법에 매여 있기 때문에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예수님 말씀을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노모스'는 헬라말 '네모'에서 왔는데
이 '네모'란 말은 보지 못한다는 뜻이고
'네모'는 '미스테리온'이란 말에서 왔는데
이 '미스테리온'이란 말은 신비란,
율법에 있으면 소경이 되어
하느님 말씀이 신비로 남아 있어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벳사이다의 눈 먼 이를 고치시다
 
벳사이다 눈 먼 이를 고치시는 예화를 통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느님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영적인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성경을 읽을 때
영적인 깨달음없이 성경을 문자로만 보면,
성경 말씀 안에 있는 하느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느님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내 안에 어둠이 있기 때문에 못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어둠인
시기 질투 분노(갈라디아서5,19)등을 하나 둘  버리면
내 안에 사랑으로 기쁨으로 평화로 인내로 계신 하느님을 보게  되는데
 
내 안에 있는 사랑의 하느님을 보는 사람은
다른 형제 자매 안에  계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2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설명:
하느님께서 창세기 2,7에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숨을 불어 넣어 생명이 되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눈 먼 이의 눈에 진흙을 바르고 침을 발라 눈을 뜨게
하시는 과정이 메시아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계시해 주시는 것인데
 
처음 소경에게 진흙을 발라 눈을 뜨게 하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고 하시니까
나무가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 것은
치료 단계가 점진적으로 치유됨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들의 믿음의 성장도 물론 한 번에 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하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라도 하고 또 엘리야라고도 하고
다른 예언자라고도 합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예수님께서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하여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메시아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무라시며 당신에 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말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볼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믿음 없이는 메시아 고백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마태 16,21-23 ; 루카 9,22-22)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메시아 고백을 했을때
이제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깨우치기 위하여
첫 번째 예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난 받고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이 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승리하여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과 구원 완성과
천국 완성시키는 메시아시라는 것을 보여 주시며,
우리들보고도 각자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수난 받고 죽는 것은 한 번이지만,
우리 심령과 마음은  계속 비우고 버려야 죽는 것이며
부부간에 싸우는 것도 살아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한 쪽이 죽으면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오래 전에 저희 자매에게
"나의 결점을 말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결점을 말했을 때는 "고맙다."고 말했으나,
두 번째 결점을 말했을 때는 대답도 하지 않고,
세 번째 결점을 말했을 때는
"당신은 저주하려고 태어 났느냐?"고 말을 했을 때,
저희 자매가 "좋습니다.
그럼 앞으로 일절 결점을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할 때
 나는 잠시동안 내 방에 들어가 묵상을 한 다음,
내가 착한척하며 위선자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자매한테 찾아가 사과하고"내가 정말 위선자였고
내 안에 선이 없고 이렇게 많은 어둠이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고 말하고 계속 결점을 말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자매는 웃으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으며
지금까지 하나 둘 나의 결점을 말해 줄 때마다 고치지만,
정신을 바짝차리지 않으면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으며
그래도 조금씩 나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며
"하느님이 나의 자매의 입을 통하여 나의 결점을 말해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감사하며
 
내가 인터넷에 글을 올릴 때도
다른 분들이 잘못을 쪽지로, 한 줄 답변으로, 전화로 말씀해 주셨을 때
그 말씀을 귀담아 듣고 참고하며 변명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설명:
인간적으로 보면 스승인 예수님께서 수난 받고,
죽고 부활하신다는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스승님, 죽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고 말하지만,
 
메시아 고백까지 했던 베드로도
수난과 죽음 후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수난과 죽음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병들거나 사업이 파산되거나
부부간이나 자녀들 사이에 어려움이 왔을 때
피하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참고 견딜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를 해야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우리 인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상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사해 놓고
구원의 길을 마련하기 위하여
말씀의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아오스딩성인도 우리들 죄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깨닫고 "오! 복된 죄여! "라고 고백했으며,
바오로 사도는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많다고 고백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죄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립시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마태 16,24-28 ; 루카 9,23-27)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인류구원을 위하여 몸과 피를 희생제물로 주시는 분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길은 죽음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수난 받고 죽고 부활할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육적인 세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으로 옮겨가는 삶이
십자가의 길이며
 
육신은 한 번 죽지만
내 심령인 마음은 매시간마다 죽이고 버리고 해서
예수님 닮은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