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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울시민 되지못한 자괴감에 위축되지만...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03 조회수427 추천수3 반대(0) 신고
            서울시민 되지못한 자괴감에 위축되지만...  
                            두 아이, 서울서 대학 생활하게 되니 더 미안해  





아이들이 자라 대학생이 되고 서울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아이들에게 조금은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일찍이 서울시민이 되지 못한 자괴감, 서울에 콧구멍 만한 집 한 채도 장만해 놓지 못하고 살아온 내 경제적 무능이 노출되는 현상에 은밀히 묘한 위축감 같은 것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과거 딸아이가 천안에서 고교를 다니며 자취생활을 할 때는, 아이가 안쓰럽고 미안하긴 해도 그다지 부끄러운 마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3년 세월이 훌렁 지나 아이가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진학을 하면서부터, 미안한 마음 위에 부끄러움 같은 게 얹혀지게 되었다.

처음 일년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학기초에는 짐을 실어다 넣어주고 방학 때는 모두 빼오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내가 직접 내 승합차에 짐을 실어 나르는 수고도 수고지만, 아이에게 미안해지고 부끄러워지는 마음이 슬금슬금 승합차에 얹히는 기분이곤 했다.

2학년 때는 기숙사 신청을 포기하고, 상도동에 사시는 처형께 부탁하여, 홀로 사시는 처형이 아이를 맡아주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는 2년 동안 편하게 생활하며 상도동에서 신촌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올해 아들녀석이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게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학교 기숙사 신청을 생각했다가 상도동 처형 댁 입주를 희망했다. 처형께 두 아이를 다 맡아주기를 부탁했다.

하지만 처형께는 남모를 사정이 있었다. 혼자이시긴 하지만 사별을 했다든지, 온전히 자유로운 형국이 아니었다. 그 사실과 관련되는 이런저런 사정을 헤아리게 되니, 계속 부탁을 하기가 어려웠다.


반지하방에 아이들 거처 마련


▲ 자취방 거실 / 내 아이들이 최소한 2년은 생활할 집의 거실이다. 내 어머니는 무엇보다도 맨 먼저 십자 고상과 성모상 모실 자리부터 신경을 쓰셨다.  
ⓒ 지요하  대학 입학

결국 처형 댁에 아들녀석까지 맡기는 것을 포기하고, 2년 동안 이모 집에서 생활한 딸아이도 나오게 하고, 두 녀석이 함께 자취생활을 하게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방 얻는 일을 했다. 마포 신수동과 서교동 쪽을 더듬다가 합정동의 한 집을 선택했다.

지하철 합정역과 상수역의 중간 지점이었다. 딸아이가 다니는 신촌 S대와 아들녀석이 다니게 된 Y대 모두 마을버스를 이용하여 손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깊숙한 골목이 아니고 큰길에서 가까운 곳인 데다가 쉽게 차를 놓을 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반 지하이긴 하지만 방 2개에 거실이 있고, 협소하나마 주방과 화장실이 딸린 집인데, 보증금 1500만원에 월세 40만원으로 계약을 했다. 그리고 지난달 28일 입주를 했다.

내 12인용 승합차의 맨 뒷좌석을 접어서 만든 공간과 중간 좌석 위에 가득 짐을 실었다. 그야말로 한 살림을 장만한 셈이었다. 중간 좌석 하나에 어머니와 두 아이가 앉았는데, 바로 앞 중간 좌석 위에 가득 쌓인 짐 때문에 운전석의 거울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올해 연세 86세이신 어머니도 함께 하신 가운데 우리 가족은 28일 오전 서울 합정동 아이들이 생활할 집 앞에 도착했다. 먼저 살던 이들이 이사를 한 그 집을 바삐 청소부터 하고, 짐들을 모두 들여놓고 대충 정리를 한 다음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상도동으로 갔다. 이번에는 처형 집에서 딸아이의 짐 옮기는 일을 했다.          

딸아이의 짐도 한 차 가득했다. 그 많은 짐이 어느 구석에 다 들어가 있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중간 좌석에는 한 사람도 앉을 수가 없어 두 아이를 모두 앞좌석에 태워야 했다. 그렇게 태안과 상도동에서 이삿짐을 나르고도 빠진 것들이 많아서 근처 마트에서 이것저것 소소한 물품들을 구입해야 했다.

여기에 텔레비전 유선방송 가입, 인터넷 이전, 노트북 지원업체 가입, 정수기 설치 등등에다가 각종 공과금 문제며 신경 써야 할 일과 돈 들어가야 할 구멍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말이지 완전히 두 집 살림을 하게 된 상황이었다.

이삿짐 정리를 모두 마치고, 이틀을 머물며 이런저런 소소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다시 한번 일찍이 서울시민이 되지 못한 자괴감 같은 것을 씹어야 했다. 괜히 아이들에게 아비의 경제적 무능을 들켜버린 것 같은 무안한 심정을 가누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나마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처지가 고맙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이삿짐을 나르는 동안 가족 모두 내 걱정을 많이 했다. 열흘 넘게 계속되는 내 두 다리의 불편함 때문이었다. 지난달 16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Y대 입학식 행사가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계속된 행사였다.

▲ 오누이의 모습 / 지난달 16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거행된 동생 입학식에 벌써 3년이나 서울 물을 먹은 누나도 함께 해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일을 했다.  
ⓒ 지요하  대학 입학

입학식 후 오리엔테이션의 일부가 학부모들에게 공개된 그 행사에 나는 끝까지 함께 했다. 학교측에서 제공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으며 갖가지 구경거리들을 즐겼는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카메라를 들고 높고 가파른 계단을 여러 번 오르내렸다. 학부모들 자리는 맨 아래층이고, 내 아들녀석이 속한 사회과학대학은 3층에 자리했는데, 나는 진득하게 앉아 있지 못하고 운동 삼아(?) 무려 세 번이나 그 계단을 오르내렸던 것이다.

2007년 12월 7일 발생한 태안 앞 바다 유조선 기름유출 사고 이전에는 거의 하루도 걷기 운동을 거르지 않았다. 하루 기본이 2시간이었다. 그러나 4개월에 걸친 '기름과의 전쟁'과 44일 동안의 병상 생활 이후로는 이제껏 걷기 운동을 거의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판국에 갑작스럽게 잠실실내체육관의 3층 계단을 세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으니 몸이 온전할 리 없었다.

18일까지는 괜찮았다. 19일에는 대전보훈병원을 다녀왔는데, 여러 시간 운전을 할 때도 그다지 다리가 불편한 줄을 몰랐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두 다리가 아프기 시작하는데, 내 생전 처음 겪는 극심한 근육통이었다. 앉고 서고 걷는 것은 물론이고, 허리를 구부리지도 못할 정도로 두 다리의 통증이 심했다.

두 다리의 근육통이 진행될 때인 24일 사촌형님 한 분이 별세하셨다. 나는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해야 하는 처지였다. 사흘 동안 절룩이는 상태로 문상객들을 맞아야 했다. 무사히 장례를 치르고, 삼우제도 앞당겨 27일 지낸 다음 28일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울을 갈 수 있었다.

그래도 몸이 많이 피곤하고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겨우 운전을 하고, 별로 무겁지 않은 짐이나 들어 나르고 하면서도, 이렇게나마 아비 몫을 다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틈틈이 성호를 긋곤 했다. 아빠의 손을 제지하면서 무거운 짐도 혼자 번쩍번쩍 들고 메고 하는 아들녀석을 볼 때는 대견스럽고 든든하여 절로 웃음이 머금어지곤 했다.

짐을 나르고 정리하는 일에는 어머니도 힘을 보태주셨다. 연세 여든 여섯인 노인네가 누구보다도 치밀하고 꼼꼼했다. 거드시는 정도가 아니라 주도를 하시니, 거의 모든 일이 어머니 뜻대로 되었다. 어머니는 무엇보다도 십자 고상과 성모상 모시는 일에 신경을 쓰셨다.

천주교 신자 가정이 살던 집이었다. 김포성당 총회장인 김영호 암브로시오 형제와 함께 이 집에 처음 들어온 순간 천주교 신자 가정임을 알 수 있었다. 벽에 걸린 십자 고상과 기도상 위에 놓인 성경책과 성모상과 묵주를 보는 순간 나는 성호를 그으며 이 집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의 4년 세월도 바람 같을 것

    

▲ 반 지하층 집 / 아빠의 인터넷 글에 초등학교 6년 시절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아들녀석이 어느새 대학생이 되었다. 앞으로 최소한 2년은 자취생활을 할 집이 반 지하임에도, 이삿짐을 나르는 녀석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 지요하  대학 입학

천주교 신자 가정이 살던 집이라는 사실에 어머니도 선뜻 동의를 하셨다. 베란다도 없고, 집이 마음에 썩 들지는 않지만, 하느님 자녀들이 기도하며 살았던 집이라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시는 눈치였다.

28일 점심은 밖에서 먹었지만 저녁은 집에서 지어서 먹었다. 내 아이들이 최소한 2년은 살  집이었다. 어쩌면 내처 4년을 살게 될지도 몰랐다. 아무튼 내 아이들이 살게 된 집에서 가족이 다 함께 처음으로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식사 전 기도'를 길게 했다. 물론 이 집에서 처음으로 하는 기도였다.

새로 장만한 밥솥으로 지은 밥이어선지 유난히 밥맛이 좋았다. 밥을 먹으며 야릇한 행복감도 맛보았다. 일찍이 서울시민이 되지 못한 자괴감, 내 경제적 무능이 또 한번 노출되어 버린 부끄러움과 미안함 가운데서도, '행복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올해 대학 4년이 된 딸아이는 내년 졸업 후에도 당분간은 서울에 머물게 될 것 같다. 교원자격을 확보해놓고,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지만…. 대학 새내기인 아들녀석은 일단 2년은 공부에만 전력할 계획이다.

딸아이가 고교 진학을 한 2003년부터 아이의 자취방에서 온 가족이 가끔 밥을 지어먹고 잠도 자고 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때로부터 어언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실로 바람 같은 세월이었다. 그 세월이 아직은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이 현재진행형은 금세 과거완료형이 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 세월이 4년 이상 남아 있는 셈이지만, 바람같이 흘러간 지난 6년처럼 앞으로의 4년 세월도 바람 같을 것이다. 그 바람같이 빠르고 덧없는 세월 속에서, 내 아이들은 인생무상의 이치도 함께 배우게 될 터이다.

나는 그것을 소망한다. 현실 소망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가운데서도 내 아이들은 인생무상의 이치 속에서 하느님 신앙과 겸허함도 잘 배우며 나아가기를….


ⓒ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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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서울시민 되지 못한 자괴감에 위축되지만...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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