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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467) 하늘색 수표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5 조회수469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9년1월15일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히브리서3,7-14; 마르코 1,40-45-
 
     (467) 하늘색 수표
                                    이순의
 
 
내가 참여하고 있는 유일한 모임이 있다. 어렵고 힘들 때 작은 한마디의 말에도 뼈 속까지 아프던 시절에 관계 안에 섞여 산다는 사실이 고통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주변정리를 철저하게 마무리를 하고 친정어머니조차 찾아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 당장 죽는다고 해도 더 이상 정리할 것이 없었을 만큼 깨끗하게 정리를 했었다. 혼자만의 고립을 선택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하늘은 실오라기 한 줄을 내게 늘어뜨리고 계셨다. 그것을 잡으라고. 꼭 그것을 잡으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고립이라는 무서운 현실을 선택한 내 눈에 그 실오라기 하나가 보이는 이유는 오로지 하늘의 섭리였을 것이다.
 
아들의 고등학교 입학 자모총회!
 
돈도 없었지만 내 자식이 특출한 성적도 아닌데다가 아빠가 고관이거나 대관인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결석하지 않고 참여하라는 날에 학교에 갔다. 그곳에서 아들의 같은 반 친구 엄마들 중에 나를 알아보는 분이 있었다. 나는 그 친구 엄마를 몰라보겠는데 그 친구 엄마는 나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통성명을 하고보니 내 여학교 3학년일 적에 우리 반 반장이었다. 결국 그 친구가 아들의 학급 자모모임에 결석하지 않게 하고, 꼭꼭 참여하게 하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친구가 있어서 그 자모모임에 갈 핑계가 섰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모모임의 수는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아들의 학교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그만 두는 엄마도 있고, 다음은 직장이나 스케줄이 모임과 맞지 않아서 빠지게 되고, 여러 가지 이유들이 등장하다가....... 회를 거듭하게 되면서 서로에 대하여 앎이 많아지고, 남편들의 위치까지 등장하게 되고....... 결국 그런저런 이유로 꼭 필요한 수의 활동인원만 남게 되었다.
 
상당한 시간 동안은 내 자신도 고민을 많이 했었다. 당시로서는 우리 집 방세 보다 더 비싼 차를 타고 모임에 오시는  엄마들 속에서 갈등을 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내 친구, 우리 반 반장이 있어서 그 자모모임에 참여 하곤 했다. 나야 달랑 회비 들고 가서 앉아만 있다가 온다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그 친목의 배려는 깊어만 갔다. 아들의 입학친구들이 졸업을 하고도 그 모임은 계속 되었다. 아들들은 명문에 입학하고 생활의 규모는 다들 늘어나는데 내 아들은 지방대를 간데다 내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나는 그 모임을 그만두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미 그만 두기에는 염치가 없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 가난하다고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이미 엄마들은 나의 처지를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낸 회비는, 아니 매월 거두기로 한 기 만원의 회비는 거의 써질 날이 없었다. 서로가 쏘는 빌미를 마련한 것이다. 누구는 1등 해서 쏘고, 누구는 남편이 승진해서 쏘고, 누구는 장학금 타서 쏘고, 누구는 쿠폰이 생겨서 쏘고, 그 긴 세월동안 좋은데도 많이 따라 다녔고, 맛난 것도 많이 얻어먹었고,......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것만 같아 그만 두려고 생각을 하여 보았다. 하지만 그동안 받은 온정들을 돌려 줄 수는 없어도 밥은 한 끼 사고 그만 둬야 하는 도리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놈의 밥 한 끼 살 형편은 내 앞의 장막처럼 가려져 열릴 줄을 몰랐다.  밥 한 번만 사게 되면 내가 이 모임을 그만 할 거라고 맹세를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밥도 못 샀는데 여행은 가게 되었다. 그동안 회비 안 쓰고 고스란히 모았으니 다 같이 일본 온천여행이라도 다녀오자는 것이었다. 아~! 황새 노는 곳에 뱁새가 발 담그고 있었으니 올 것이 왔구나! 쾌히 응답을 못한 내 얼굴은 웃고 속은 떨리고....... 그런데 엄마들은 이미 나에 대한 배려를 다 하고 있었다. 회비를 모아서 여행을 가기로 한 것은 내가 여행비용을 감당하지 못할 까봐서 내린 배려였다. 그 세월동안 얻어먹은 것이 내가 낸 회비보다 많았을 텐데 회비 모은 것으로 여행을 가면 서로에게 부담되지 않고 자존심 안 건드리고 공평한 마음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아들의 친구 엄마들 덕택에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다. 내 일가친척들도 내 얼굴보기 보다 해외에 나갈 공적 사적 업무가 더 많은 세상에서, 나는 해외에 나가는 게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려웠어도, 그 엄마들이 해외여행 가기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을 텐데, 그렇게 알뜰히 몇 년 동안이나 모은 회비로 나는 일본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보지 못한 노천의 온천욕은 정말로 황홀했다. 겨울의 찬 하늘을 바라보며 몸 담근 온천의 맛이라는 것을 처음 겪은 터라서 촌스럽게도 나 혼자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느라고....... 히힛! (그런 나를 다같이 바라봐 주고, 이해해 주고....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지금 생각해도 행복하고 고마울 뿐이다. 모두들 그 난전의 온천에서 빙 둘러 앉아 이야기 꽃 피우느라고 깔깔깔깔 소녀 되었던데....... 나만 안 들어 가 본데없이 다 들어가 보았으니......... 히히히히히 그리고 잠자리에서 둘 씩 짝이 지어졌다. 내 짝궁은 전교 1등 아들의 엄마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학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아들의 엄마였다. 우리 모임 중에서 쏠 일이 가장 많았던 엄마이기도 하지만 그 쏘는 일을 자처하여 온갖 핑계를 다 만들어서 열심히 쏘는 바람에 나까지 일본여행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공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이셨다.
 
그런데 이 분이 엊그제 모임에서 나에게 살짝꿍 하늘색 수표를 한 장 쑤셔 넣어 주시는 것이었다. 말씀인 즉 곧 우리 아들이 군에서 제대를 하게 되는데 복학하는데 보태서 쓰라는 한마디와 함께 주신 것이었다.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분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공교롭게도 우리 둘 만 일찍 온 것이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이제는 그렇게까지 가난하지 않다고 더 가난한데 드리라고 극구 부인을 했지만 언젠가 부터 목을 지어 마음을 쏟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그 거절도 결코 쉽지 않았다. 다른 엄마들이 한 분 두 분 모여 들면서 그 실랑이는 계속 되지 못했다. 모임 내내 내 마음의 선택은 고민 중이었다.
 
다 같이 유쾌한 점심을 먹고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하늘색 수표의 주인께서 자리를 비운 잠깐의 사이에 나는 그 수표를 꺼내 놓았다. 짙은 갈색의 탁자 위에서 흰 봉투에 담긴 푸른빛은 유난히도 맑았다.
<저기요. 이거 **엄마가 주신 것인데요. 안 받으려고 했지만 받았으니 여러 엄마들 앞에 내어 놓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을 알려드립니다. 우리 ◇◇가 제대를 하더라도 등록금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수표는 정말로 헛되지 않게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여러 벗님들께 드러내 보여야 할 것 같아서 알려 드립니다.>
엄마들은 좋은 마음으로 주신 것이니 이렇게 보이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그 푸른 수표의 종점을 알려 드리고 싶었다.
 
집에 오면서도, 도착해서도, 잠을 자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오직 그 푸른색 지폐의 종점을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 오래 전에 내가 봉사활동을 했던 곳들도 생각이 났고, 지금 가난한 친구도 생각이 났고, 오지의 신부님 수녀님도 생각이 났고, 진짜, 진짜, 내가 도와야 할 곳이 그렇게 많은지 미처 모를 만큼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았다. 그래도 혼자서 내린 결론이 있기는 있었다. 
그분은 대한민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교회의 곤사님이시다. 그 신앙의 모습을 오랫동안 보아 온 터라서 그 가늠의 척도를 감히 입에 오르내릴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큰 아이가 아프다. 그분이 믿는 하나님이 그 사랑의 어려움을 아셔서 그토록 잘난 작은 아들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큰아이가 아파서 그분은 큰아이와 같은 친구들이 모여 살 수 있는 재단을 그 교회에 설립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 노력은 감히 그 아픔을 당해 보지 않은 자 로서 입에 담기조차 송구스런 헌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딱 한 번 권면은 해 보았다.
 
<개신교회는 부모님 사후에 재단이 어떻게 변할 지 모르므로 모든 제도적으로 안전하고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노후까지도 안전한 가톨릭을 선택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어요?>
그분의 신앙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간단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권해 보았다. 종파를 떠나서 현대 종교들의 모순들이 그 힘을 쥔 자에 의해 얼마나 허황되게 변질되는지를 우려해서 드린 걱정이었고 권면이었다. 가톨릭은 어떤 시설이 변질되기 위해서는 많은 제약을 넘어야 한다. 그만큼 개인의 힘으로는 용도변경이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제도적으로 각각의 교회의 수장들에 따라서 여러 모습을 취하기 때문에 부모님 사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에 대하여 지극히 현실적인 우려를 해 볼 뿐이었다. 그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분이 아무리 돈이 많다 하더라도 재벌은 아니며, 그분이 아무리 웃는다 한들 가슴 한 쪽은 늘 주님께 온전히 번제물로 받쳐야만 되시는 분이 아니던가?! 그런 분께서 주신 하늘색 수표의 최종 종착지를 선택하는 게 피정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래서 지방 갔다가 온 짝궁에게 그 수표를 보여 주었다.
<이게 뭔데?>    <그분, 에스ㅇㅇ! **엄마가......>
<우리가 가난하다고?>  <아니 꼭 그렇다기 보다 마음이 있어서 주신 것이지.>
<자네 알아서 해.>   <그분이 다니는 교회에 복지 시설이 있다는데 그쪽으로 보낼까?>
<나는 몰러.>  <큰아이 이름으로 보내도 될 것 같아서.......>
<좋은 마음으로 주셨는디 그것은 아닌 것 같으네.>   <그런가?>
 
그리고 여러 날 만에 집에 온 짝궁은 저녁밥만 먹고 또 일터가 있는 시장으로 갔다. 동절기라서 일거리도 없지만 놀아도 시장에서 노는 사람이 짝궁이다. 뭐 20하고도 몇 년을 과부 처럼 살아왔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그저 20 몇 년을 한 순간도 빼지 않고 시켜 온 성호경을 그어서 내 보낼 뿐이다. 사실 나는 많은 기도문을 잘 외지 못한다. 그렇다고 나에게 기도를 적게 한다고 누군가 힐책을 한다면 좀 억울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순간은 살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성부와를 시키면 짝궁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을 기가 맥히게 잘 한다.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분이 있는지 생각 좀 해 보세요. 서방니임.>
<아니여. 나는 그런 것은 몰러. 그런 것은 마누라가 전공 아니었등가?! 댕겨 옴세.>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짝궁이 들어 왔다.
<저녁에 ^^기사에게 고기 사 주기로 했는디 어쩐가? 짐을 실코 왔는디 겨울이라 물건이 팔려야지 말이시. 그래서 유치 되야서 낼 꺼정 팔아야 쓴갑데. 착실헌 기사인디 한 푼이라도 벌어 보것다고 겨울에 짐을 실었으니 고생이제. 딴 기사들은 겨울에 일 안허고 쉬는디......>
그때 성령의 응답이 왔다. 짝궁에게 저녁에 나가서 그 기사에게 고기를 사 드리지 말고 집으로 모시고 와서 찬은 없어도 고기를 사다가 집에서 집밥으로 대접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 기사님은 지난여름에 내 짐을 싣고 다녔다. 여름 내내 산골에서 나와 함께 낮을 살았고, 늦은 오후가 되면 트럭 가득 짐을 싣고 서울 시장으로 갔다. 총각무 짐방 출신에서 쌍축 5톤 트럭 기사님까지 되셨으니 총각무에 관한한 달인인 셈이다. 그래서 아직도 많이 서툰 내 곁에 전진 배치된 기사님이시다. 그러니 그 감사와 노고를 입은 쪽은 내 쪽일 것이다. 짝궁도 흔쾌히 동의했다. 
<나 그 수표 그 기사님 드릴 거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자네가 믿는 하느님이 만드신 일 같으네. 그러소.>
 
그 기사님은 큰아이는 건강하다. 그런데 늦둥이로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장애가 있다. 주변에서는 시설에 맡기라고도 하고, 포기하라고도 하고, 아무튼 가족 중에 장애가 있게 되면 주변의 시선과 말들은 늘 따가워 지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그 기사님은 5톤 트럭을 샀다. 안전하게 작업만 하는 짐방 일을 접고 조금 더 벌기 위해서 짐을 싣고 고속도로를 질주해야 하는 5톤 트럭을 샀다. 언젠가 그런 푸념을 하더란다. "형님, 우리 아기 손 한 번 잡아보고 대학병원의사가 5만원 받읍디다." 그 아픈 푸념을 짝궁이 스치며 전해 주었는데, 온 나라가 꽁꽁 얼은 이 강추위 속에 얼은 짐을 싣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는 내가 알고 있다. 겨울에 벌이가 많지 않아서 여기저기서 꿈 질을 했다는 소식도 어렴풋이 전해 들었다. 농산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국가 경제와 상관없이 겨울이 끝나는 시점까지는 상상을 초월한 보릿고개를 겪어야 한다. 아마도 이 겨울 동안에 아이를 데리고 서울의 큰 병원을 오갈라치면 많이 서러울 것이다.
 
자식은 아픈데 돈이 없을 때....... 아~!
 
그 하늘 색 수표를 주신 분에 대하여 충분한 말씀을 전해 드렸다. 동병상련의 고통까지도 전해 드렸다. 꼭 병원비로 쓰라고 부탁도 드렸다. 그 수표가 필요한 분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주님께서는 다 알고 계셨다. 그렇지 않고서야 각자의 입장을 사는 사람들인 짝궁이 지방에서 귀가 할 리도 없었을 것이고, 그 기사님이 이 엄동에 짐을 싣고 오셔서 못 팔고 유치 될 리도 없었을 것이고, 짝궁이 안쓰러운 마음과 고마웠던 마음을 담아 고기를 살 리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 신부님께서는 강론 중에 "독서에 나오는 오늘은 은총의 시기를 말씀하십니다. 수많은 날들 중에서 오늘을 놓치지 마라는 뜻입니다."라고 하셨다. 사노라고 살다가 보면 어데 오늘 뿐이던가. 한 순간도 내 뜻이 아니며 오직 창조자이신 전능하신 분의 뜻이 아니던가?! 그 뜻에 늘 깨어 행하여야 할 몫이 나에게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있을 뿐이다. 
 
ㅡ"오늘" 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겪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히브리서3, 13ㅡ
 
 
 
 
 
 
 
 

 

-음악이야기 이강길님 것 얻어 왔습니다.-

참 예쁘네요 / 현경과 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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