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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 (77) 공공의 적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5 조회수515 추천수1 반대(0) 신고
 
 

작성자      이순의(leejeano)                작성일      2004-02-25 오후 11:42:14

 

2004년2월25일 재의 수요일(금식과 금육) ㅡ요엘2,12-18;고린토2서5,20-6,2;마태오6,1-6.16-18ㅡ

 

   (77) 공공의 적

                    이순의

           


ㅡ사순시기ㅡ

재의 수요일이다.

암울한 참회와 속죄를 통하여 고통의 주님께 통회를 청해야만 하는 비탄의 시기가 돌아왔다. 또 얼마나 많은 나의 상처들과 아픔뿐만 아니라 죄들까지 끌어내어 낱낱이 고해야 한단 말인가? 독서와 복음서들은 감춰진 양심의 썩은 뿌리마저도 가만두지 않고 도려낼 것인가?

 

힘들다.

사순의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아득한 힘겨움이다. 산다는 것과 인생을 순환시키고 있는 질서 안에서 담아두기도 하고, 묻어두기도 하고, 보류하기도 하고, 숨겨두기도 한 수 많은 사연들을 다시 꺼내서 펼쳐보게 하는 말씀의 위력 앞에 또 나는 어떤 순명을 허락할 것인가?

 

용서하라.

왜 용서 받으라 하지 않고 용서 하라고 하시는 건가? 왜 자선을 받으라 하지 않고 자선을 베풀라고만 하시는 건가? 왜 받으라 하지 않고 하라. 하라. 하라는 요구를 지치도록 듣고 외치면서 골고다언덕을 동반해야 하는 건가?

 

사순시기가 싫다.

삶을 역고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동안 가슴속 깊이 묻어둔 양심의 고통까지 꺼내서 보라는 말씀들의 독촉이 싫다. 나는 또 무엇을 토하고 또 무엇을 이실직고 하며 또 무엇을 참회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냥 묻어두고 고이고이 꼭꼭 묻어두고 세월가면 잊어지도록 내버려두면 안 되시는 것인가?

 

주님께서는 왜 고통 받는 자의 편이었는가?

왜 가난한자와 병든 자와 헐벗은 자와 아픈 자와 소외받는 자와 과부와 장님과 중풍병자와 왜 그런 사람들의 편이 되셨는가? 멀쩡한 사람 다 놔두고 그저 그런 인간은 좋아 하시면서 우리에게는 하라고 명령만 하시는가?

 

우리는 흔히 긁어 부스럼인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바른말 하는 사람도, 억울함을 외치는 사람도, 지니지 못한 주제에 꼽사리끼어든 사람도, 그저 그런 사람을 싫어한다. 그리고 요구한다. 네 마음만 죄 짓는 짓이라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하소연을 해 봐야 너의 마음이 깨끗하지 못 해서 죄 짓는 거라고. 한 번 끝났으면 말 일이지 그 일로 너의 혀뿐만 아니라 영혼을 더럽히지 말라고. 성수 대교가 무너지고도 그랬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도 그러했고, 대구 지하철 참사도 그러했다.

 

이 사회가 이 국가가 내 주머니 배불려 놓지 않으면 노후를 보장 받지 못하는 이중경제의 먹구름 안에서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너무나 억울하고 비통한 약자들의 눈물 앞에 하라. 하라.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소 잃고 외양간도 고치지 않는 주인의 정체가 부재중인 억울함조차 그만두라는 세상이 아니던가?!

 

용서 하고 싶다. 참말로 용서 하고 싶으니 제발 용서 좀 하게 해 달라고 청해 보아도 용서를 받을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용서를 하라는 사람만 있으니 답답한 심정을 어쩌란 말인가? 도대체 용서를 받을 사람은 어디로 가고 용서를 하라고만 요구하는가?

 

용서를 하려해도 용서 받을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너의 편이 많았으니 외로워하지 말라고 위로를 한들 그건 조롱이 아니던가? 말뿐인 위로는, 대충 그만하고 조용히 자빠져 있으라는 암묵적 명령이 아니던가? 휴대폰 수출해서 팔아다가 정치자금 받지 말고 농산물 수입해서 망조든 농민들에게 나눠줘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나 살기도 바쁜 세상에 남의 눈물 흐를 때 텔레비전 열심히 보아 줬으면 되었다고, 나라가 잘 산다는데 농민들은 왜 저러느냐고 한심스런 무관심의 돗자리를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니던가? 우리는 지금 용서를 하려해도 용서를 받을 수조차 없는 그들을 용서하라고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께서 그들의 편이시라는데도 입으로만 주님을 따를 뿐 너무도 아픈 그 사람들에게 가해자는 아니었을까?

 

사순시기를 맞으며 신앙인으로서 교회 안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많이 보아왔다. 용서하기도 힘든 사람에게 먼저 용서 받으라는 위로보다는 용서하라는 요구를 해 버리는 모진 교우관계 또한 많이 보아왔다.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서 또는 편협 된 정보로 인해서 너의 용서는 우리들의 꽃이라는 걸 강요하게 되기도 한다.

 

주님은 용서하라는 사람의 편이 아니다. 용서 받을 사람의 편에 서서 항상 항구한 요구를 하신다. 마음이 힘들고 슬픈 사람에게 용서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사순시기를 보내고 싶다. 용서를 받는 시기를 보내고 싶다. 용서 받고, 위로 받고, 사랑 받으라 하고 싶다. 용서하기 위해서 악다구니도 쓰는 거고, 용서하기 위해서 몸부림도 하는, 그런 사람에게 제발 용서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싶다. 모두가 공공의 적이 아니던가?! 아! 고통의 사순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ㅡ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고린도2서5,20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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