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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병규 신부님 요한 묵시록 해설 / 필라델피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18 조회수476 추천수1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필라델피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여기는 뭐 특별한 것은 또 없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재건 또 여기도 지진의

영향을 받아서 조금 이렇게 파괴 됐었어요. 티베리우스 황제가 또 재건을 했고.

재건하는 동시에 또 뭡니까? 신전이 있고 그렇게 또 자기 황제 숭배를 위한 그런

것이 있었고 이 교회와 관련해서 이 필라델피아 지역은 아주 의미가 있는 것이

필라델피아 그리스도인들이 스미르나에서 순교를 했습니다. 11명이 뽈리까르또와

함께.

 

여기 교회의 어떤 순교자를 배출한 어떤 구체적인 기록이 있고 스미르나 교회 그쪽

지역으로 끌려가서 순교자가 나타난 그런 어떤 교회와 관련해서 나타난다. 자, 그러면

우리가 한번 들어가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묵시 3,7: 필라델피아 교회의 천사들에게 써 보내라.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에 대한 표현이 길지요?  자, 거룩한 이. 예수님이 거룩하신 분.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이 진실한 이, 참되다라는 거 요 단어를 가지고 한번 보겠습니다. 이 참되다라는

말은, 늘 진실하다라는 말은 뭐와 연결해야 하느냐 하면, 신앙이라는 단어 와 연결해

집니다. 히브리 말에 '에메트'입니다. 에메트인데 이 신앙은 아까 제가 말씀 드렸지요?

 

어디 이렇게 타존재에게 기대는 것 이전에 충실성, 굳건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보면 진실한 이, 참된 이라는 것은 굳건함, 강직함 이런 의미로 우리가 가져야

되겠습니다. 

 

* 참되다(히브리어: 에메트): 굳건함, 강직함

 

요한 복음에 보면 이 참되다라는 표현이 예수님이 되게 많이 나옵니다. 참된 빛이시고,

참된 빵으로써 뭐 이런 여러 가지 어떤 참되다는 것이 예수님께 많이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이거 왜 참되다는 말이 적용이 되는가? 왜 굳건하다, 강직하다는 의미가 왜 이

신앙과 연결해야 되는가?

 

예수님의 삶을 한번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 가지고 어디에 어떻게

강직하고 굳건하셨습니까? 어디? 누구? 어떤 분의 뜻?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아주 강직

하게 어떤 의미에서 신앙의 모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어요. 신앙의 모델을. 그분의 뜻

만을 추구한다.

 

가끔씩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지요?
사랑하셔가지고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오셨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러

이곳에 오셨는가? 이 두 개를 갈라 놓는 것 자체가 좀 모순적입니다마는 인간을 먼저

사랑하셨을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일까? 이걸 생각하다 보면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것이 곧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이었지 않을까? 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을 사랑했으면 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와 율법학자들과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들을 조금 싫어하셨을까? 그리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분들은 왜

그렇게 다 내쫓았을까? 인간적 사랑이 앞섰다기 보다는 하느님에 대한 뜻을 강직

하게 추구하신 게 먼저 앞서지 않았는가?

 

우리가 인간적으로 사랑을 하다보면요. 뭐라 하지를 못해요. 내가 이 사람을 인간적

으로 사랑하면 아이구, 좋은 사람인데 뭐 잘못되면 아,~~으~~(어찌 할려다가도)

이러다가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예컨대 정말 내가 뜻이, 정의가 정말 하느님의 뜻이 분명히 서 있으면 잘못된

거 보이면 뭐라 하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께서 그 수석 제자인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아, 그러니까 아주 멋있게 뭐 "사탄아 물러가라!" 이런 거 같지

마는 당시 상황에서 사탄아 그러면은 우리 강아지 있죠? 강아지는 붙여서 하는 욕들

많지 않습니까? ^^*~~~ 그 이상의 욕입니다. 예, 뭐뭐뭐 ^^**~~~

삐~~ 하고 방송에 나요죠? ^^*~~~ 그러한 욕을 했다는 거예요.

 

"나를 사랑하느냐? 너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사랑의 관계를 요구하고 원하셨던

예수님이 그 욕을 하셨다는 것. 이거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요?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 개념보다 하느님의 뜻에 더 강직하게 나아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진실한

이 이 단어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자,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예수님은 다윗 가문이죠? 다윗하면 떠오르는 게 메시아죠? 정통 안에서.

그런데 열쇠를 가지신 분입니다. 열쇠를. 이사 22,22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 이사 22,22: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매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엘야킴에게 히즈키아의 왕권을 이렇게 수여합니다. 왕권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권력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그 어떤 뜻이 온전히, 하느님의 힘이 이 사람에게

온전히 주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왕권은 주어지는 거지요.

 

열면 닫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거? 그만큼 하느님의 힘이 강하다는 거죠.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의 열쇠를 가진이.

요한 묵시록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어떤 힘, 절대 한번 열면 닫을 수 없는 것.

이것이 가장 부합되는 일이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처음으로 이렇게 태어나신 분. 죽음을 이기신 분. 처음으로.

그러면 이 죽음의 어떤 문을 활짝 열어서 생명의 문으로 열어 젖히신 분.

그분을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겠습니다.

 

*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죽음의 문을 열어서 생명의 문을 여신 분

 

구약에서는 왕권을 이야기했지마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신 분.

그게 궁극적인 어떤 하느님의 힘이라고 우리가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이 열려진 문. 열면 닫을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 묵시 3,8: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보라, 나는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을 네 앞에

                  열어 두었다.

 

필라델피아 신자들에게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 오롯이 열려진 문.

자, 열려진 문이라는 이 개념을 한번 보면, 바오로 사도가 어떤 즐겨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 1코린 16,9: 적대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큰 문이 나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이상한 표현이 있습니다. 적대자들이 많다. 바오로 사도가 뭐하시는 분이셨습니까?
예, 선교. 이방인의 사도. 이 많은 반대자, 적대자들이 있었다? 선교를 하는데 장애물이

많았단 말이죠. 그러나 큰 열려진 문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막힘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 큰 문이 나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막힘이 없다.

 

지금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을 내 앞에 열어 두었다라는 것은 필라델피아 신자들에게

그 누구도 너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그리고 이런 복음적인 삶 이런 것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다라는 의미로 그렇게 받아들이시면 되겠습니다.

 

자, 힘이 약하다는 개념과 뒤에 보면 굳게 지킨다.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힘이 약하다는 것은 세상적인 어떠한 삶의 자리가 열악하다는 것입니다.

뒤에 거는 강하죠? 내 말을 굳게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신앙적으로는

엄청 강한, 힘이 약한 것은 세상적인 것.

 

왜 보통 이렇게 성당에서 우리 교회가 활동하는 걸 보면 세상에 이렇게 한번 보여줘야

되는데. 행사를 해도 좀 화려하게 사람들 이렇게 우싸 우싸 이렇게 많이 와 가지고 그죠?

멋지게 행사를 히야 되는데. 이런 사고 방식이 과연 교회적인 것인가?

 

마더 데레사가 그러셨죠?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이라고. 그런 어떤

말씀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고 이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모든 이가 되는 것이지.

 

예컨대 행사를 한다고 그래 가지고 몇 명 왔어? 교무금 얼마 냈어? 교회 신자수가 몇

명이야? 이것으로 우리 하느님 백성을 평가하는 어떤 우리 모습들.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들 숫자가 얼마 안 되고 너희들 작은 공동체지마는 너희들이

신앙은 너무나 강대하고 크다. 이것 한번 우리가 한번 많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 묵시 3,9: 보라, 나는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을 이렇게 하겠다.

 

사탄의 무리? 우리 한번 봤습니다. 그죠? 유다인들. 디아스포라에 사는 유다인들.

그 사회에 적응해서 타협해서. 가짜 하느님 백성. 진짜 하느님 백성은? 요한 묵시록

관점에서 진짜 하느님 백성은? 어? 답이 나와야 되는데 ^^*~~~

 

자, 가짜 하느님 백성을 말하는 디아스포라의 유다 백성들. 디아스포라에서 그 문화,

그 바깥에서 문화에 융화되서 막 살아가는. 가짜라고 평가하고 그것을 사탄의 무리라고

까지 표현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진짜 하느님 백성은? 그리스도인. 예수께 진짜로 제대로

신앙을 가지는 요러한 관점을 요한 묵시록은 가지고 있습니다.

 

* 묵시 3,9: 그들은 유다인이라고 자처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도 사탄의 무리. 유다인이 아니다. 유다인인데 진짜 유다인인데 유다인이 아니다.

 

* 묵시 3,9: 보라, 나는 그들이 와서 네 발 앞에 엎드리게 하겠다.

 

자, 요기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디아스포라에 살아가는, 지금 필라델피아

그 안에 살아가는 유다인들. 유다 공동체 그 애들은 유다인들이 아니다. 저짓말을 한다.

얘들이 너에게 와서 엎드리게 하겠다는 거예요. 엎드리게 하겠다. 요거 이사야서 45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이사 45,1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집트의 재산과 에티오피아의 소득과

   키 큰 족속 스바인들이 너에게 건너와서 너의 것이 되고 너의 뒤를 따르리라. 그들은

   사슬에 묶여 건너와서 네 앞에 엎드려 빌며 말하리라. "과연 당신에게만 하느님이

   계십니다. 다른 이가 없습니다. 다른 신이 없습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면에서 위로와 격려를 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다른 힘센 이집트가 너에게 와서 "당신에게만 하느님이 계시다."며

완전히 찬미 찬송을 하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와 희망의 메세지죠. 왜 이 말을

하는가? 이 마지막 때에 정말로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들어 높여질 때에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니까 모든 다른 민족들은 너희들의 그 참됨을

보고 경배할 것이다.

 

요 전통 요것을 이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안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시킵니다. 유다인들이 너 앞에 와서, 네 발 앞에 엎드리게 하겠다. 참된 백성은

그리스도인이니까. 유다인들은 가짜이까. 이건 어떤 개념이 담겨져 있는 것이죠?

예, 그래서 내가 참으로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살아가는 이가 많은 민족들이 그것에

대해서 존경하고 존중하고 그래서 엎드리겠다.

 

* 묵시 3,19: 그리하여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자, 요한계 문헌의 특징? 사랑 나오죠? 또. 사랑한다는 것을 하느님과 인간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도인의 일치는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면서 다른 비신자들이 우리를 알아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행사 멋지게 하고, 아~~따, 자들 돈 많다. 자들 뭐 멋지게 하네. 이걸로 우리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 누구 유명인 신자라더라. 누구 정치인 가톨릭 신자라더라.

이것으로 우리 이름 날리면 안 되죠? 서로 사랑하는 모습 안에서 이름을 날려야죠.

 

하느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랑의 어떤 행동

실천을 사회가 알게끔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모든 민족이 우리 교회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 들어높여 가지고, 멋진 건물 세워가지고  멋진 어떤 행사 하는 것이 우리를 드러내

는 행동이 전혀 아님을 우리가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 묵시 3,10: 네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땅의 주민들을 시험하려고 온 세계에

   시련이 닥쳐 올 때에 나도 너를 지켜주겠다.

 

자, 요 문장을 잘 보시면요. "니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무슨 말을 지켰다구요?

인내하라고. 요래 말하면 예수님은 요러구 옆에 살짝 빠져 있다가 어려움 당하는데

"야, 좀 참아라." 그러면 "예, 참겠습니다." 하고 참는 요런 의미가 있지요? 번역이 중요한

거예요. 물론 이 번역도 맞다고 할 수도 있지만 원문 그대로 하면 말이 좀 딱딱하니까.

 

* 네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으니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 나의 인내가 뭐겠습니까? 뭘 예수님이 참았습니까?

"아버지 이 잔을 저에게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 꽈악 참는 거예요. 예수께서 피땀을 흘리셨다고

그러지요? 그거 가능하다고 그러네요. 의학적으로. 정말 극도의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는

이 땀이 피가 섞여 나온대요. 예, 그게 가능하다네요.

 

그렇게 어려운 고통을 당하시고 그렇게 하셨던 예수님의 인내의 어떤 모습. 그것을 의미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너희들이 나의 고통, 나의 인내에 함께 참여하라는 거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예수님의 삶의 어려움, 삶의 인내에 너희도 참여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살아가다 불편한 거 그거 인내해라. 무조건 내 십자가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뭐 쉽게 얘기해서 다른 표현으로 해 봅시다. 내가 돈을 벌어야 되는데, 주식 떨어지고 힘들어

죽겠습니다. "하~! 예수님, 예수님!" 이런 식의 이건 십자가가 아니예요. 이건 예수님의 인내

에 참여하는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어떤 삶의 모습을 따라 갈려고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거

이것이 우리의 십자가가 되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니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는

무조건 참는 것이라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것. 그렇게 참여 했을 때

지켜 주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땅의 주님들, 이 땅의 주님들을 시험하려고 온 세계에 시련이 닥쳐

올 때에 나도 널 지켜 주겠다. 이 시련은 예수님의 삶에 참여하는 이가 아니라 온 세계의

시련이 닥쳐오는데 땅의 주민들에게.

 

* 땅의 주민들(묵시 3,10): 예수님의 삶에 참여하지 않는 이

 

예수님의 심판은 예수님과 관계없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뒤에 가서 우리 묵시

문학적인 장면 안에서 많은 징벌들이, 뭐 대접을 갖다 붓고 이러는 거. 그것을 내가

이제 당하는 거, 세상 모든이에게 징벌이 오는 것처럼 이해하지 마시고 징벌의 모습이

등장할 때마다 보면, 신앙이 없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굳건함이 없는 그런 사람들에

게 주어지는 겁니다.

 

예전에 말씀드렸지요? 땅의 주민들 혹은 땅의 3분의 1 이러한 표현들이 한계적인 어떠한

신앙이 없는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만 징벌이 주어진다. 신앙을 가진 우리는 아무런 걱정

을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천상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나 신앙에 한번 속했다고 뭐 우리 해병대 그러죠?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한번 해병 갔다 왔다고 영원한 해병이 되는 거가 우리 신앙이 아닙니다. 한번 신앙이

영원한 신앙의 아니라 한번 신앙인이었다가 바로 또 내일 악마가 되고 사탄이 될 수

있는 게 우리 신앙이기에. 그래서 깨어 있어라. 꾸준하게 가야 되는 거죠.

 

* 묵시 3,11: 내가 곧 간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지켜, 아무도 네 화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

 

자, 요기서는 되게 희망적인 메세지입니다. 아무도 네 화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

다른 교회에 보면 이렇게 이렇게 지키고 나면 화관을 주든 생명을 주든 뭐를 주는데

여기서는 이미 화관이 있어요. 니 화관, 너의 화관, 이미 화관이 있어요.

이 필라델피아 교회는 굉장히 잘나가는 교회예요.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예, 인내하라는 말을 지켰고 또 화관이 이미 있습니다. 안 뺏기게 지금. 

그래서 필라델피아 교회에 제일 중요한 것은 신앙, 이 가진 것 그거 어떻게 꿋꿋이

지커라라는 격려의 메세지가 아주 강한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따르고 지금 그랬지마는

그거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지켜라라는 것입니다.

 

* 묵시 3,12: 승리하는 사람은 내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아 다시는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없게 하겠다.

 

자, 여기서 성전의 기둥입니다. 유다 전통에 보면 아브라함은 세상의 기둥이라고

불리워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기둥. 왜?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이 하느님의 어떤 작품을 참된 신앙인으로서 떠 받치는 어떠한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자, 여기 성전의 기둥입니다.  자, 우리 건물로 생각하시면 안 되죠?

여기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성전이라는 것.

 

* 성전(묵시 3,12): 하느님과의 일치된 어떤 모습, 하느님의 현존 안에 하느님 백성이

   함께 있는 것.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하느님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신다. 임마누엘이죠. 일치의 기둥이 된다.

일치의 기둥이 된다는 것은 뭡니까? 그 일치를 절대 깨뜨리지 않는 어떤 참된 버팀목.

이 필라델피아 교회 신자들이 얼마나 이렇게 칭찬을 많이 받고 있습니까?

 

교회의 반석으로 하는 베드로의 모습과 어떤 일맥상통합니다. 그죠?
베드로가 교회를 세우는 어떤 그 반석이 되는 것. 필라델피아 교회 신자들이 교회의

기둥이 되고 하느님의 현존의 기둥이 된다는 것. 이거 우리가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 묵시 3,12: 그리고 네 하느님의 이름과 내 하느님의 도성, 곧 하늘에서 내 하느님으로

   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에게 새겨 주겠다.

 

자, 새 예루살렘, 새 이름이 나옵니다. 새롭다라는 거 제가 설명드렸습니다. 그죠?

새로운 것은 신상품이 아니라 내가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의 관점에서 주관적으로

새롭게 다가가는 것.

 

예루살렘, 예루살렘이라는 그 어떤 표징은 옛날 구약부터 예루살렘, 예루살렘이죠.

그러나 나에게 새로운 예루살렘은 내가 하느님의 현존 안에 내가 참가할 때, 일치

할 때 나에게는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 이름도 하느님과 함께 일치하는

것이구요.

 

* 묵시 3,13: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계속 반복되는 표현이니까 모든 교회의 메세지다.

필라델피아는 우리가 이미 가진 신앙을 굳건하게 열심히 지키자라는 말이 여기

있습니다. 그 지키는 어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또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그 어떤 의미

에서 내가 가진 신앙을 표현하는 것. 그거 이웃과 함께 사랑의 실천을 해 나갈 때

그것이 꿋꿋하게 잘 표현이 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게 필라델피아

신자들에게 보내느 말씀이었습니다.

 

자, 숨가쁘게 여섯 개 교회까지 왔습니다. 자 마지막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에 대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라오디케이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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