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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을 떠난 자가 걷는 몰락의 내리막길-룻기1
작성자이광호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25 조회수649 추천수2 반대(0) 신고

하느님을 떠난 자가 걷는 몰락의 내리막길-룻기1

<생명의 말씀>
 영웅들이 세상을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 때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사람이 모압 시골에 가서 몸붙여 살려고 아내와 두 아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며 아내는 나오미, 두 아들은 마흘론과 길룐이었는데, 그들은 유다 베들레헴 태생으로 에브랏 집안 사람들이었다. 모압 시골에 가서 얼마 동안 지내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뒤 두 아들은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았는데 하나는 오르바요, 다른 하나는 룻이었다. 거기에서 십 년쯤 살다가, 마흘론과 길룐 두 사람도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나오미는 남편을 여읜데다 두 아들마저 잃고 말았다 (룻 1:1-5)

<말씀의 길잡이와 실천>
룻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은 판관기의 시대입니다. 1절에 영웅(=판관)들이 다스리던 때라고 그 시대적 배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룻기가 기록하는 시대에도 판관기 시대의 전형적인 특성이 여실히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하느님 말씀과 명령을 지키며 살기보다는 자기 멋대로 살았다는 것이지요.
 
판관기의 저자가 긴긴 판관기 전체를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멋대로 하던 시대였다.'(판관기21:25)라고 요약하며 판관기의 전제 서술을 마친 것을 판관기를 공부하신 분이라면 모두 기억하고 있으실 줄 압니다.

룻기의 서두에 나오는 한 집안의 사람들도 판관기 시대의 전형적인 특성 그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유다 사람들이었고 베들레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떨어졌다는 이유 때문에 하느님이 주신 땅을 버리고 이방인들의 땅인 모압으로 옮겨가서 살았습니다. 왠지 익숙합니다. 판관기에서 여러 번 접해 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이 분배해 주시면서 꼭 지키고 살라고 명령하신 자기 땅을 버리고 이방인들의 땅으로 옮겨 가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신약의 모든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 우리는 베들레헴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장차 다윗 왕이 태어나서 자라고 그 후손으로 예수님이 태어나실 곳이 바로 베들레헴인 것입니다. 그런 계획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에게 그 땅을 분배해 주시면서 지키고 살라고 하신 것인데 그런 하느님의 그 계획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엘리멜렉과 그 가족들에게 베들레헴은 언제든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장소일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에 경제적인 번영과 안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데 경제적인 조건만이 최우선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이 가르침이 최고의 우위에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가치가 다른 조건들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태오 4:4)하는 예수님 말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멜렉과 나오미 가족은 하느님이 주신 땅을 떠났습니다. 가나안 지역은 전쟁을 치러서 빼앗은 땅이기는 했지만 도저히 자기들만의 힘으로는 빼앗을 수 없었던 땅을 하느님의 능력으로 손에 넣었기 때문에 각 지파들이 분배받은 땅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이것은 내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셨습니다.'하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런 하느님과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직접 싸워 얻어 주신 땅을 떠난다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버리는 행위였습니다. 그래도 그런 의식이 희박해진 시대의 사람들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미련없이 버리고 더 나은 경제적 조건을 찾아 떠났던 것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살 길 찾아 떠나야지!'하는 논리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는 항구한 원칙은 온데간데 없고 언제나 상황윤리와 상황논리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시류에 편승하여 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당장 이득을 주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 땅을 지키고 가꾸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그것을 저버린 것은 비난을 면할 수 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모압 땅으로 거처를 옮긴 한 가족은 이방인의 땅으로 옮긴 것에서 한 술 더 떠서 이번에는 이방인 며느리 얻습니다. 당시의 율법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과 혼인을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도 그 집안은 모압 사람 며느리를 둘이나 얻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살게 되면서 하느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만 골라서 한 것입니다.

흉년도 피했고 며느리도 얻었으니 뭔가 잘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번영은 1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 집안은 곧 몰락의 내리막길을 달리게 됩니다. 5절을 다시 읽어보면 "이리하여, 나오미는 남편을 여읜데다 두 아들마저 잃고 말았다."입니다. 상황이 좋건 나쁘건 지키고 있어야 할 곳을 떠난 자의 결말이 어떤 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구절입니다. 한 집안의 안주인인 나오미는 자신이 잃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어서 더 잃을 것도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룻기 전제의 내용을 알기 때문에 이 가정의 믿음 없는 행위로 인해 몰락하였지만 하느님께서 무한한 은혜를 베푸셔서 결국에는 위대한 선을 이루셨다는 것을 압니다. 또 더 황당한 것은 그 위대한 선이 얻어서는 안될 이방인 며느리인 모압 사람 룻을 통해서 왔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조금 힘들다고 하느님께서 주신 땅을 떠난 것과 또 이방인 여인을 며느리로 받아들인 그 사실까지도 선행으로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엘리멜렉의 가족이 범한 실수와 죄를 하느님께서 역이용하셔서 선하게 인도하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은 당연히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지만, 덩달아 자신의 실책을 하느님께서 협력하여 이루신 그 선한 결과와 함께 얼버무려서 얼렁뚱땅 넘어가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번거롭고 고달프다는 이유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단련의 훈련을 피해버리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보아야만 합니다. 꼭 어떤 훈련과정이란 이름이 붙어있어야만 훈련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바로 끊임없는 훈련과정입니다. 섬기고 봉사하는 삶이 고달프고 성가시게만 느껴져서 그 삶을 그만두고 싶고 공동체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게 바로 유혹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 해서 그것이 나에게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만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참 어리석은 태도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허락한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당신의 삶의 질을 결정할 것입니다. 창세기의 요셉을 생각해 보면 더 잘 이해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실수를 통해서도 선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선하고 지혜로우신 그분이 우리의 죄까지도 당신께 가까이 오는 도구로 이용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께서는 "하느님께서 악을 허용하시는 때는 오직 그것이 선으로 바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다"하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또 " 아!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복된 죄여!"하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삶에서 체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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