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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마르9,2-1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06 조회수3,40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8월 6일 금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마르9,2-10)

   

 

1독서<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다니7,9-10.13-14)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그분의 옥좌는 불꽃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 이었다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또는><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1,16-19)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17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내가 사랑하는 이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18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19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화답송 시편 97(96),1-2.5-6.9(◎ 1과 9)

◎ 주님은 임금이시다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다.

○ 주님은 임금이시다땅은 즐거워하고수많은 섬들도 기뻐하여라흰 구름 먹구름 그분을 둘러싸고정의와 공정은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

○ 주님 앞에서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네주님 앞에서 온 땅이 녹아내리네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보네

○ 주님당신은 온 땅 위에 지극히 높으신 분모든 신들 위에 아득히 높으시옵니다

 

복음<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마르9,2-10)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하나는 모세께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제1독서 (다니7,9-10.13-14)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다니엘서 7장 9절부터 14절까지는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광경가운데 두번째 장면으로서 다니엘서 7장 2~8절의 벨사차르 제일년(원년)에서 보았던, 바다에서 나온 각기 다른 형상을 지닌 큰 네 짐승의 환시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네 마리의 각각 다른 짐승들이 온 세상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 세상은 하늘에서 그 옥좌를 두고 앉아계신 하느님에 의해 심판되며, 사람의 아들(인자)같은 분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아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나라를 부여하게 된다는 사실이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다니엘이 본장에서 본 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 및 그분의 궁극적인 심판과 승리를 예언하는 다니엘서 2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첫번째 꿈과 다니엘서 4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두번째 꿈과 그 기조를 같이하는 환시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은 이와같은 꿈의 내용을 성경에 기록함으로써, 당시 바빌론 벨사차르 왕의 통치하에서 현재와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보고 있던 하느님의 백성에게 희망을 부여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땅에서는 그 짐승같은 인간 통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진정한 통치자는 하느님 이시라는 사실 및 하느님께서는 언젠가는 당신 백성들에게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권세와 나라를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어두운 세상의 권력 하에 살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은 힘과 용기를 내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고, 하루하루를 승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는 '옥좌들이 배치될 때까지 나는 응시하고 있었다'(I kept looking until thrones were set up)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놓이고'로 번역된 '레미우'(remiu)의 원형 '레미'(remi)는 '던지다', '배치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앞의 짐승들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옥좌가 던짐을 당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심판을 베풀기 위한 하느님의 옥좌가 새롭게 배치된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제 짐승들의  때 특히 마지막으로 일어난 작은 뿔의 시대는 지나갔고,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의 때가 도래하는 것이다.

 

하늘의 영들은 하느님께서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앉으시도록 하느님의 옥좌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다니엘은 바로 그러한 장면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옥좌'에 해당하는 '코르싸완'(korsawan)은 원형 '카레쎄'(karese)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옥좌'에 앉으시는 재판관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따라서 수(number)가 호응을 이루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본문의 복수형은 문자 그대로 '옥좌'가 여러 개 있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높고 영광스러운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장엄 복수형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의 복수형 '옥좌'에 대한 타당한 해석을 정리해 보면, 이처럼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거나, 삼위일체 하느님 위격 각자가 동등한 심판자의 자격으로 앉을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 하느님의 우편에 인자같은 이가 동등한 자격으로 앉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마태26,64; 다니7,13), 하느님의 성도들이 심판자의 자격으로 하느님 곁의 어좌에 앉아 심판할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일 수 있다(묵시20,4).

 

그런데 이어지는 문맥만을 고려한다면,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리고 날들의 고대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and the Ancient of Days took his seat)라는 의미로 거의 대부분 영역본들이 번역되었고, 어떤 것의 경우는 '가장 존경할 만한 한 분이 좌정하셨다'(one most venerable took his seat)로 의역하였다.

 

그렇다면 '날들의 고대'(the  Ancient of Days)란 표현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것은 일차적으로 너무나 오래 되어서 측량하기 어려운 긴 시기를 나타내며, 이차적으로는 하느님의 영원성(eternity;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영원 존재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연로하신 분'(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은 세상의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성부 하느님(God the Father)만을 단독으로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분은 원래부터 하늘의 옥좌에 앉아 계시지만, 이제는 특별히 세상 왕국들 및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심판의 옥좌에 좌정하신 것이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마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께서는 흰 옷을 입고 계셨고, 머리카락 역시 흰 색이었다.

'그분의 옷'에 해당하는 '레부셰흐'(lebusheh)의 원형 '레부쉬'(lebush)는 어원적으로 예복이나 긴 겉옷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하느님의 옷이 마치 흰눈(white snow)처럼 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도덕적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둘째는 하느님의 존엄성과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셋째는 하느님의 풍성한 앎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다.

 

요한 묵시록에서 큰 환난을 겪어 내어 하늘에 올라간 사람들 역시 흰 옷을 입은 모습으로 제시되는데,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7,13~14).

 

만약 이들의 흰 옷이 그들의 영적 도덕적 순결성을 강조한다면, 여기서 하느님의 눈처럼 흰 옷 역시 그분의 거룩하심, 순결하심, 순수하심, 온전하심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흰 머리카락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묘사된다.

양털처럼 흰(깨끗한) 하느님의 머리카락은 사람들의 이해와 결부해 볼 때 하느님의 나이가 매우 많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잠언서에 백발은 노인의 영광의 상징으로 나오며(잠언16,31; 20,29), 요한 묵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털도 희기는 눈과 같고 양털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묵시1,14).

 

이상의 의미를 종합하면, 본문은 하느님께서 존재론적으로 영원무궁하시고, 도덕적으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온전하시어 죄에서 완전히 떠나 계신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다니엘의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옥좌는 화염으로 휩싸여 있거나 화염 그 자체였다.

그 옥좌에는 여러개의  바퀴들이 있는데, 그 바퀴들 역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이거나 또는 그러한 불로 휩싸여 있었다.

 

이와같은 영상은 의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엄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이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휩싸여 계신다고 말한다(1티모6,16;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다니엘이 본 그 불꽃 혹은 이글거리는 화염은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태우는 불 이라기 보다는, 악인들을 심판하는 심판의 두려움을 자아내고, 하느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 임재하셨을 때, 동반된 여러 현상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이러한 화염이었다(탈출19,18). 

또한 에제키엘이 환시가운데 본 하느님의 임재 및 그분의 옥좌 역시 불꽃으로 휩싸여 있었고, 또 그 옥좌에 여러 개의 바퀴들이 달려 있었다(에제1장).

하느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하늘로 끌어 올리실 때에도 불 병거와 불 말들을 사용하셨다(2열왕2,11).

 

다니엘이 후에 티그리스 강가에서 본 환시 속의 한 분은 그 분이 횃불처럼 생겼고, 그 팔과 다리는 광을 낸 청동 같았으며(다니10,6),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서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역시 그의 눈이 불꽃같고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같이 생겼다(묵시1,14.15).

 

다니엘서 10장과 요한 묵시록 1장의 주체는 성자 하느님을 묘사한 것이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와 성부와 동일한 본체이시며 동일한 영광과 위엄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철저히 불꽃에 둘러싸인 분으로 묘사하는 본문은 하느님의 위엄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장엄한 것인지, 죄스런 인간이 가까이할 수 없는 그의 거룩한 영광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면모 앞에 사람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두려움과 떨림 외에 어떤 태도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10)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의 옥좌에서는 이글거리는 불이 마치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본문에서 '뿜어 나왔다', '퍼져 나왔다'에 해당하는 '나게드 웨나페크'(naged wenaphek)는 두 단어 모두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불이 하느님의 옥좌로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모습을 강조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지속성을 임시한다.

 

또한 '그분 앞에서'라는 표현은 불꽃이 하느님의 몸 속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좌정해 계시는 그 옥좌로부터 나온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 흘러나오는 불의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니엘은 마치 강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고 묘사한다.

 

이렇게 흘러나오는 심판으로서의 불은 세상 나라들 특히 작은 뿔이 상징하는 적 그리스도를 심판하는 불이다. 

이 불은 적 그리스도를 포함한 모든 악한 세력들에 대한 심판이 끝날 때까지 하느님의 옥좌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올 것이다.

 

한편 '백만'과 '억만'에 해당하는 '엘레프 알르파임'(elep allpaim)과 '립보 랍베완' (ribbo rabbewan)은 고대 세계에서 형언할 수 조차 없는 많은 숫자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를 나타내는 데 이처럼 헤아릴수 조차 없을 만큼 많은 수를 들고 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그 명령을 수행하는 소임을 맡은 존재들이다. 이 문맥에서는 특히 심판과 관련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대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문에서 '그분을 시중드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 '예샴메슌네흐'(yeshameshunneh)는 문자적으로 '그들이(백만) 그분을 시중들고 있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이곳밖에 사용되지 않지만, 문맥상 수많은 천사들이 하느님을 시중들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확실하다.

또한 본문에서 '모시고 선'에 해당하는 '예쿠문'(yequmun)은 문자적으로 '그들이(억만) 모시고 서 있다'라는 의미이다.

 

천사들은 하느님과 나란히 옥좌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 옥좌 곁에 서 있으면서 하느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동시에 그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숫자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위엄을 드높여 줌과 아울러 하느님의 권세와 능력, 그리고 그분의 역사하심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고 광대무변함을 암시한다.

 

한편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면서 책들이 펼쳐진다.

'책들'에 해당하는 '씨프린'(siprin)은 어원상 '기록하다', '계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싸파르'(sapar)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여러 권의 책들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심판대에 펼쳐져 놓인 이 책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말들이 다 기록되어 있는 책이며,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책이다.

 

모세는 이 생명책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탈출32,32), 사도 요한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말하였다(묵시21,27).

또한 사도 요한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책으로서 그들의 행위가 기록된 책을 언급한다(묵시20,12).

 

본 문맥에서는 이 두가지의 책 가운데서 행위를 기록한 책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심판이 행위를 기록한 책에 근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심판이 절대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매우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복음(마르9,2~10)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아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2~4)

 

마르코 복음 9장 2절에서 13절까지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마르9,2~8)과 그것과 관련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를 나눈 사건(마르9,9~13)에 대한 기록이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앞의 마르코 복음 8장 2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을 성부 하느님께서 확인해 주신 사건임과 동시에,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성취된 것임을 보여 주는 의미도 지닌다.

 

뿐만 아니라 마르코 복음 8장 31절에 나오는 첫번째 수난 예고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힘이 없어 받는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수난이며, 단순히 수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영광을 회복하실 것을 예표하는 의미도 지닌다.

 

예수님의 공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뜻을 갖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르8,29)과 첫번째 수난 예고(마르8,31) 이후에 있는 거룩한 변모 사건은 예수님 생애의 중대한 전환적 의미를 지니기에 공관 복음서 저자들은 이 사건을 다 기록하고 있다(마태17,1~8; 루카9,28~36).

 

마르코 복음 9장 3절에서 천주 성자 제2위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내재하고 있던 충만한 신성(콜로2,9)의 표출로 말미암아 주님의 옷은 광채로 빛나며 새하얗게 되었다.

여기에서 '빛났다'로 번역된 '스틸본타'(stilbonta; shining; dazzling)는 여러 차례 문지른 금속 따위가 번쩍이며 빛나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 '스틸보'(stilbo)의 현재 분사형이다.

 

변모산에서 주님의 옷은 마치 금속이 번쩍거리는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또한 '새하얗게'로 번역된 '류카'(leuka; white)의 원형 '류코스'(leukos) 역시 '빛나는', '찬란한'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마태오 복음 5장 36절과 요한 복음 4장 35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천상적 존재에서만 볼 수 있는 찬란하면서도 흰 색깔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도 천상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사건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마르코 복음의 기사에서는 마태오 복음(17,2;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과 루카 복음(9,29;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의 기록에 있는 기사는 빠져 있지만, 정황으로 볼 때 주님의 얼굴도 찬란하게 빛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9장 4절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는데, 원문에는 마르코 복음 9장 3절과 4절이 등위 접속사 '카이'(kai; and)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나타나'로 번역된 '오프테'(ophthe; there appeared)는 '보다'는 뜻을 지닌 원형 '호라오'(horao)의 직설법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이렇게 신약 성경에서 부정과거 수동태로 쓰였을 경우에는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이나 성령님, 또는 천상적 존재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 보인 것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구약의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유다인들에게 '모세'와 '엘리야'는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자로서(2열왕2,11) 유다인들이 다시 올 것을 대망했던 예언자이며(마르9,1), 모세는 비록 죽었지만(36,5) 유다인들은 하늘로 산 채로 올라갔다고 믿고 있던 인물이다.

 

이들은 율법과 예언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므로, 이들이 예수님께 나타나 그와 더불어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 성경을 결코 부정하거나 없애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며,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야이며, 율법과 예언서의 약속의 말씀과 예언들을 성취하실 분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마태5,17참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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