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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8-07-03 조회수614 추천수10 반대(0) 신고
 
 
토마 사도는 밖에서 뭘하고 있었을까?
예수님의 시신을 찾고 있었을까?
토마스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길 원했다.
그것은 이런 사실을 말해준다.
토마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멀리서나마 그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했던 말을 떠 올렸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날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몰려 와서 물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들고 예수님께 던지려 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해 다시 갈릴래아로 내려가셨다.
그런데 유다 지역에 살던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지체하다가 라자로를 깨우러 가겠다고 나섰다(요한 11,6-7).
그 때 제자들이 모두 말렸다.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그 때 토마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요한 11,16)
그렇게 용감했던 토마스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의 반대세력이 많아지고
예수님도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주면서 마지막 유언 같은 말씀을 하자 이렇게 말한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토마스는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주는 예수님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가 했던 맹세가 계속 가슴 속에 남아 마음을 괴롭혔을 것이다.
“우리도 가서 같이 죽읍시다.”
토마스는 저 멀리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님의 손과 발을 보았고
그때 마다 자기 손과 발에도 커다란 쇠못이 박히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토마스에게 그 못은 양심을 찌르는 못이었다.
같이 죽자고 했는데 왜 나는 여기 있는가?
지금이라도 저걸 말려야 하지 않을까?
토마스는 그 못자국이 보고 싶었다.
그토록 자기 양심을 찌르던 못자국이었다.
자기도 당해야 했을 죽음이었다.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셨던 분인데 다시 살아났다니 너
무나 반갑고 기뻤지만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다.
그치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분이 살았으니 자기도 다시 산 것이다.
토마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자기 자신이었다.
같이 죽자고 했다가 비겁하게 도망쳤던 몸이라
동료 제자들 앞에 나타나기도 부끄러웠다.
길에서 다른 제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그 말 그대로 자기 앞에 다시 나타난 예수님은 너무나 고마운 분이었다.
다시 살아나 주셔서 자기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았다.
너무나 귀한 죽음과 삶이었다.
예수님은 죽음과 삶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위대한 분이었다.
토마스에겐 하늘같이 높고, 위대하고, 고맙고, 귀한 분이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었다.

여담이지만, 새 번역 성경이나 전례서에 쓰인 용어가 너무 낮 간지럽고 지나친 느낌이 든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님께 결례가 되지 않고 합당한 표현이 되는 걸까?
나에게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 맞는 표현이고 더 생생한 느낌을 전해준다.
토마스 사도도 그 당시, 그 감격적인 순간에는 “나의 하느님”하고 불렀지
온갖 정성을 다 바쳐야지 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굴리고 굴려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묻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다.
너희 각자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이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나의 하느님”이지 “저의 하느님”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주여! 한다고 하느님의 본질이 깎이고 또, 주님! 한다고 그분의 본질이 더 높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불러도 상관 없는 일이다.
외람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께 심한 말로 욕한다고 해서
그분의 존재가 비하되거나 깍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하느님” 하거나 “나의 하느님” “주여”하고 그분을 부른다고 그분이 낮추어지는건 하나도 없다.
또한 우리가 그분을 높여드린다고 해도 어떻게,
또 얼마나 높여 드려야 합당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분께 합당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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